기본소득의 이론적 근거라던가 경제윤리적 기초 같은 형이상학적 사유는 학자들이나 하는 현학적 유희 내지 두뇌자위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것은 필요하다. 먼저 노동의 개념부터 본다.
기본소득은 '노동' 개념에 기초하여 지급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누구나 동의한다. 그렇다면 노동의 개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달팽이산책님이 언급한 '근로'가 기본소득의 지급논리가 되는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그림자노동을 포함한 모든 인류적 기여로서의 근로에 대한 대가가 기본소득의 지급과 수혜의 당위성이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어떤 대가를 따지지 않고 다만 사람이 원숭이나 달팽이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지급논리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노동이나 근로가 아닌 '활동'을 기본소득이 뒷받침해 주게 된다. 그리고 이 동적인 활동의 개념을 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Being이 된다. 즉 인간의 Being에 대해서 지급되는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생각이다.
노동이나 근로는 대가의 논리이다. 활동(Being)은 대가를 넘어선 논리다.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경제윤리는 노동이며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경제윤리는 근로 내지 활동이다. 따라서 기본소득론자의 입장에서는 근로와 활동 둘 중에서 어떤 것을 기본소득의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느냐의 문제가 남게 된다. 비록 관념적인 문제이기는 해도 반드시 짚고는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먼저 기본소득의 단기적 쟁취점은 근로이고 궁극적으로는 활동을 지향한다는 포지셔닝이 있을 수 있다. 얼핏 이 생각은 가장 합리적인 생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당장은 그림자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기본소득을 지급받을 수 없다는 논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본소득 진영의 주류적 입장은 모든 이에게 동일한 액수의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 정산지급형이 아닌 - 전액지급형을 주장하고 있다. 이로부터 기본소득의 지급방식 그 자체가 본래부터 근로가 아닌 활동 즉 인간으로서의 존재(Being)에 대하여 지급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가 인간의 원형 내지 기본형임을 전제로 하여 이 원형의 순수성을 지켜주기 위한 제도가 기본소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기본소득은 당장 눈앞의 실업 대책을 넘어선 천상의 제도이다. 본래부터가 그런 제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다. 즉 이미 인류는 천국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아문젠이 남극 정복을 할 때 그는 너무도 열심히 걷는 바람에 남극점을 지나쳐버렸다. 뒤에 따라오는 동료가 저 앞에 있는 아문젠에게 외쳤다. "여기가 남극이야" 아문젠은 뒤돌아보고 남극점으로 되돌아왔다.
지금의 경제문제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 생겨난 문제가 아니라 목적지를 지나쳐버리는 바람에 발생하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