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레이스의 유토피아적 맑스주의와 21세기 꼬뮨주의
- 빠레이스에 대한 비판과 변형
곽노완(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1. 들어가기: 꼬뮨주의 - “유토피아에서 역사적 필연성으로”
빠레이스(Parijs)는 ‘기본소득(basic income, Grundeinkommen)’ 논의를 중심으로 푸리에(Furier)의 유토피아주의를 맑스주의와 결합하여 꼬뮨주의 논의를 쇄신하려고 시도하는 벨기에 학자이다.
‘기본소득’은 최근 유럽에서 급속히 부상하는 이론적‧정치적 흐름의 모토이기도 하다. 그 내용은 “모든 사회성원에게 조건 없이 생계에 필요한 기본소득을 연령별로 균등하게 지급하라”는 것이다. 얼핏 21세기판 유토피아로 들리는 ‘기본소득’은 역설적이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된 주장이다.
‘기본소득’은 1986년에 판 더 벤과 빠레이스(van der Veen/Parijs 2006a, 1쪽 참조)에 의해 최초로 체계적으로 이론화되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주장은 멀게는 19세기에 푸리에가 주창하였으며 20세기 전반기에 들어서는 버트란드 러셀이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Russel 1918, 18쪽). 심지어 1960년대에는 신자유주의의 대표자중의 한 사람인 밀턴 프리드만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Friedman 1962).
1990년대에는 네그리 등 이태리와 프랑스의 후기 자율주의자들과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이를 수용하면서, 모든 사회성원이 프롤레타리아트이고 이들은 “하루 종일 도처에서 일반적으로 생산한다”(Negri/Hardt 2000, 508쪽)고 하면서 ‘기본소득’의 이론적 기초를 새로이 근거지웠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는 ATTAC(금융관세시민연대) 독일지부가 ‘기본소득’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1990년대 후반 이후 맑스주의자들인 크래트케(Krätke), 분석맑스주의자들, 블랙번(Blackburn 2000), 캘리니코스(Callinicos 2006) 등이 여기에 가세했다.
2006년은 ‘기본소득’ 논의가 다시 한번 비약적으로 확장된 시기이다. 독일의 자본가인 베르너(Werner)가 시사주간지와 라디오 등에서 인터뷰를 통해 ‘기본소득’ 논의를 광범하게 전파했다. 그는, 노동소득세 등 모든 직접세를 폐지하고 소비세를 인상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하자는 새로운 주장을 전개한다. 그럼으로써 기존 ‘기본소득’ 담론이 가진 문제점, 곧 ‘생산량과 노동유인의 축소’를 내포한 휴머니즘적 유토피아의 한계를 넘어서서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을 확장한다.
현재 ‘기본소득’ 논의는 지구적 차원에서 BIEN(Basic Income Earth Network)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유럽의 기본소득론자들이 주도하여 BIS(Basic Income Studies)라는 잡지를 창간했다(www.bepress.com/bis 참조). 독일에서는 www.unternimm-de-zukunft.de, www.netwerk-grundeinkommen.de 등이 ‘기본소득’ 운동과 이론을 연결접속하는 대표적인 인터넷 사이트이다.
이 글은 주요 ‘기본소득’론의 경제철학적 근거와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그 이론적 한계는 ‘기본소득’이 ‘사회연대소득’으로 대체될 때 넘어설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2. 빠레이스와 판 더 벤: 유토피아 비판과 맑스의 유토피아
판 더 벤과 빠레이스는 「꼬뮨주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A Capitalist Road to Communism”)」이라는 논문에서,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필요에 따른 분배”를 경제원리로 내세운 꼬뮨주의 2단계는 1단계인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서 곧바로 이행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곧 자본주의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으며, 점차 모든 소득이 ‘기본소득’으로 환원되면 모든 사람들이 균등한 소득을 올리는 “필요에 따른 분배”, 곧 꼬뮨주의 2단계가 완전히 실현된다는 것이다(2006a, 6쪽 참조).
얼핏 유토피아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주장은, 역설적이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그들에 따르면, 윤리적으로 바람직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작동 불가능한 기획에 대한 연구는 시간낭비다. 한편 경제적으로 접근 가능하더라도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기획도 시간낭비라고 한다. 경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모두 의미가 있는 기획만 정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앞의 글, 3쪽).
그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본‧자연(토지)를 제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사회소득(social income)"(앞의 글, 9쪽)으로서 현금급여를 지급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에 따르면 “사회소득”은 몇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바로 간접 임금이다. 이는 간접적으로 노동기여(labor contribution)와 연관되어 있다. 곧 ‘사회소득’에 대한 권리는 일할 수 없거나 일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로 제한된다. 이는 선진국에서의 실업연금과 대체로 유사한 것으로 과거에 일정량의 노동을 했다는 전제하에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에까지 확대가능하다. 이는 그들이 지적하듯이 80년대의 앙드레 고르(Gorz) 등이 주장한 것이다(앞의 글, 9쪽 참조). 이 경우 노동 또는 적어도 노동하려는 의지가 ‘사회소득’ 수혜의 자격요건이다. 판 더 벤과 빠레이스는 이 경우 ‘사회소득’의 증가는 필요에 따른 분배를 원리로 하는 꼬뮨주의로 이행할 수 없다고 한다(앞의 곳 참조).
둘째는 일정한 최소한도에 밑도는 소득을 올리는 가구에 대해서 차액을 이전급여(transfer payment)로 보상하는 제도이다. 이 경우 노동기여와 소득의 연계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이는 이미 여러 선진국에서 작동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모든 개인이 다른 소득과 상관없이 조건없는 지급(unconditional grant)을 받을 권리를 갖는 경우이다. 곧 기존에 많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도 추가적으로 이를 받게 되는 경우이다. 이는 버트란드 러셀(Russel 1918, 81쪽)이 옹호한 견해이다. 단 조건 없는 급여의 수준은 나이와 핸디캡 수준에만 의존한다(앞의 글, 10쪽).
판 더 벤과 빠레이스에 따르면 두 번째와 세 번째 모두 ‘사회소득’의 증가로 꼬뮨주의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이다. 하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꼬뮨주의로의 이행을 죽음의 목표로 가두어 둘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차액을 보상하는 보장소득(make-up guaranteed income)제도는, 사람들이 보장소득 이하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수용하지 않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지 않아도 최저기본소득인 월 2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190만원 월급을 받는 노동을 해도 10만원을 보조받아 최저기본소득인 월 200만원의 소득을 올리면 누가 190만원을 받고 노동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수를 줄여 1인당 세금부담을 증가시키고, 실업자들의 박탈감도 증가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앞의 글, 11쪽). 이런 점에서 ‘사회소득’의 두 번째 형태는 비현실적이고 유토피아적이라고 본다.
이에 반해 세 번째 형태인 무조건적인 보편급여는 모두에게 추가적인 소득이기 때문에, 노동유인을 크게 감소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매월 무조건적인 기본소득 200만원이 주어지면 월 190만원을 받는 노동자의 총소득은 390만원이 되며 따라서 노동유인은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가 폐지되면 효과는 더 커질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노동소득세를 내는 사람이 두 번째 경우보다 늘어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각자의 세부담도 줄어든다고 한다. 따라서 두 번째 경우보다 월등히 현실적이라는 것이다(앞의 곳). 나아가 무조건적인 보편급여는 매력적이 않고 제대로 보상받지 않는 노동의 임금을 인상시킬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하도록 내몰리는 절대적 빈곤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매력적이고 보상을 많이 받는 노동의 임금은 인하될 것이라고 한다. 추가적으로 보편급여를 받기 때문에 매력적인 노동이 적게 보상되어도 지속적으로 수용된다는 것이다(앞의 글, 13쪽).
그들은 세 번째 형태의 무조건적인 보편급여 곧 ‘기본소득’의 점진적 증가는 강요된 노동중심의 패러다임에서 자유시간과 향유 중심으로 삶의 방식을 전환시킬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 각자 원하는 노동을 하게 되어 노동이 자유시간과 구분되지 않으며 결국 “삶의 일차적인 욕구”(MEW 19/21; 앞의 글, 5쪽)가 되는 꼬뮨주의로 이행의 계기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꼬뮨주의로의 자본주의적 이행은 유토피아적인 꿈에서 역사적 필연성으로 전환된다.”(앞의 글, 21쪽)
그러나 유토피아를 넘어서서 “역사적 필연성”을 지향하는 판 더 벤과 빠레이스가 바로 여기서 다시 유토피아로 돌아간다. 이는 마치 맑스가 유토피아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유토피아적 주장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선 두 가지 차원에서 맑스의 유토피아를 검토해 보자.
첫 번째는 유토피아적 노동개념이다. 맑스는 1857-8년에 집필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