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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제목 [소책자] 기본소득 도입이 필요합니다 (2009년 11월 1일, 권문석 금민 김성일)
글쓴이 사무처
기본소득 도입이 필요합니다

발행일 | 2009년 11월 1일
편집 | 권문석, 금 민, 김성일
발행 | 사회당 기본소득위원회ㆍ사람연대 교육위원회
후원 | 사회당ㆍ사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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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을 향한 연대 ‘사람연대’
사람연대와 함께 하는 단체: 대학생사람연대, 사회당, 인연맺기운동본부, 전국노동자회, 행동하는의사회

펴내며

2007년 대선의 화두는 경제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제시했던 7% 경제성장은 현실적 가능성을 떠나 경제성장의 떡고물이 나에게도 떨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경제가 어렵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로 경제는 언제나 어려웠고 서민들은 고통분담을 강요받았습니다.

외환위기 10년 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경제를 뒤흔들었고, 자기 가치의 수만 배가 넘는 거품을 키워온 자본은 앉은 자리에서 붕괴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의 위기입니다. 하지만,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고통은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좀 살게 해달라고 경제를 외치지만, 그들은 서민들을 더 많이 착취하고 수탈하기 위해 경제를 외칩니다.

신자유주의 수탈 체제는 모든 사회공공성을 파괴하고 민주주의 일반 가치들까지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파괴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 그 자체입니다. 공권력이 자행한 용산학살은 그 절정이었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정리해고 저지 투쟁 역시 이윤을 앞세운 정권과 자본의 살인적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차별과 배제는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며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사회의 열외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더 나은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한 사회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대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안이라는 말은 실체 없이 허무한 구호로 맴돌고는 합니다.

민주주의는 선거권과 피선거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국민이 사회로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고, 물질적 독립을 획득할 때에만 주권은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본소득’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2009년 11월 1일
사회당 기본소득위원회
사람연대 교육위원회

목차

기본소득?

공상에서 현실로
 몽상가들
 21세기 현실정치로의 진입

선별적 현금 지급을 넘어서는 보편적 복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 빈곤의 덫에 빠뜨리다
 근로장려세제 : 노동빈곤층 확산에 대한 미봉책
 선별적 복지의 모순

기본소득 재원과 기본복지 수립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와 부자 증세
 교육·의료·주거·보육·노후 등의 기본복지 수립
 기본소득과 최저임금

노동과 기본소득
 권리의 관점에서
 노동자운동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사회운동을 가능하게 할까?
 대안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 가능한가?

국민주권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확립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
 국민주권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찾아
 기본소득은 민주주의 운동이다

질문과 답변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물가인상률을 반영하여 기본 생활을 보장하는 수준으로 매월 지급하며, 교육 의료 주거 보육노후 등의 기본복지와 함께 한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빠레이스Philippe Van Parijs(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국제자문위원회 의장, 벨기에 루뱅대학 교수)는 기본소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하는 소득
일회적 지급이 아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
국가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공동체 단위로도 지급할 수 있는 소득
세금을 통한 재분배 혹은 자원 분배를 재원으로 하는 소득
정치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지급하는 소득
개인을 단위로 모두에게 균등하게 지급하는 소득
자산 심사 없이 지급하는 소득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를 묻지 않고 지급하는 소득

공상에서 현실로

몽상가들

1980년대 중반, 벨기에에서 ‘샤를 푸리에 써클Circle Charles Fourier’이라 지칭한 이들이 ‘개인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매달 지급하라.’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이 처음에 등장하였을 때, 그들의 써클은 샤를 푸리에만큼이나 공상적으로 보였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는 새로운 공동체를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노동을 선택할 수 있었고, 모두가 그 공동체의 주인이었다. 이 공동체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의식주에 필수적인 소득이 조건 없이 보장되었다. 푸리에는 그러한 공동체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하려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몽상가, 때로는 미치광이로 불렸다. 그러나 푸리에가 죽은 지 150년 후에 생긴 ‘샤를 푸리에 써클’은 같은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유대는 점점 폭이 넓어져서 1988년에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 BIEN(Basic Income Europe Network)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BIEN(Basic Income Earth Network)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21세기 현실정치로의 진입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켰고, 21세기로 들어서면서는 이들을 이제는 몽상가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적어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기본소득이 이미 현실로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브라질 상원 의원 수플리시Eduardo Suplicy에 의해 기본소득은 제도권에서도 강하게 주장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수플리시가 기초한 시민기본소득 입법안이 브라질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았고, 2004년 1월 8일에는 룰라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하였다. 적어도 브라질에서만큼은 기본소득이 현실이 된 것이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분명한 요구가 실업자들, 정치인들, 성직자들, 과학자들과 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들은 2004년 7월 독일 기본소득 네트워크를 창립했고, 창립 당시 50여 명에 불과하던 회원은 5년 동안 2,000명 이상의 개인과 60개 이상의 단체로 늘어났다. 2009년에는 52,000명 이상의 독일 시민이 온라인 청원을 통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도입을 요구했고, 같은 해 가을 총선에서는 적어도 100명 이상의 후보가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확산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이었다. 2007년 대선에서 한국사회당(현재 사회당)의 금민 후보는 국민기본소득제를 첫 번째 공약으로 내걸었고, 민주노동당의 내부 조직 중 하나인 ‘전진’도 ‘시민기본소득권’을 헌법에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2008년에는 민주노총 기본소득 프로젝트팀이 발족하여 이듬해 1월에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를 발간했고, 이즈음 한국에서도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결성되었다.

기본소득과 유사한 발상의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되지만, 우리가 지금 ‘기본소득’이라고 부르는 개념과 원칙에 대한 체계화는 1984년 3월 샤를 푸리에 써클이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시나리오를 출판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그 후 20여 년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이 아이디어에 경도되고, 혹은 경멸하고, 혹은 맞서면서 수많은 논쟁과 출판이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새로운 대안사회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본소득은 바로 민주주의이며 민주공화국 이념의 사회적 구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는 그 수만큼 많은 설명 방식과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수많은 이유가 나타나고 있다. 강조점의 차이와 부분적으로는 입장의 대립에도 이들은 단 한 가지 부분에서 공통적 합의를 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필요하고, 가능하며, 정당하다”

선별적 현금 지급을 넘어서는 보편적 복지

기본소득은 잔여적 복지로 기능을 해왔던 기존의 현금지급형 복지와 보편주의라는 측면에서 가장 크게 대립한다. 많은 보완과 발전 과정이 있었지만, 기존의 현금 복지는 엄밀한 자격 조건을 규정하고 까다로운 심사에 따라 차별적으로 지급된다. 반면, 기본소득은 아무런 심사가 없으며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한국의 현금지급형 복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근로장려세제가 대표적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 빈곤의 덫에 빠뜨리다

1999년에 제정되어 2000년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활이 어려운 자의 최저생활 보장과 자활을 위해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대상자를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칭했으나, 이후 사회보장이 시혜가 아닌 수급자의 권리라는 측면이 두드러지면서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명명되었다. 기초생활보장은 현금지급과 현물지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현금지급은 생계비지원 총액에서 개인의 소득을 빼는 보충급여 방식이다. 이 현금급여는 의료, 주거 등 부분급여와 합산되어 지급총액으로 계산되므로, 실질적으로는 급여총액이 보충급여방식이라고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엄격한 자산 및 소득 심사가 존재하며, 재산과 소득으로 간주하는 범위 또한 매우 넓다. 이웃이나 친지로부터의 지원금도 소득으로 분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생활실태로 보아 소득이 없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자’에 대하여 적용하는 ‘추정소득’이 명문화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수급자의 생활을 통제하는 효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재산 축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수급자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저지한다.

근로장려세제 : 노동빈곤층 확산에 대한 미봉책

근로장려세제는 노동빈곤층 Working Poor을 지원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개선하기 위해 2006년에 도입된 것으로, 미국에서 1970년대부터 시행된 EITC(Earned Income Tax Credit)의 모방이다. 이 제도 역시 까다로운 자격기준이 있다. 근로장려세제는 부부합산 연소득 1,700만 원 이하, 자녀 1인 이상인 무주택 가구 단위로 지급되는데, 이 기준은 기혼 여성의 노동 의욕을 확연히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며, 좁은 기준 때문에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가지고 있다. 독신자, 한 부모 가정, 자녀가 없는 부부 등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제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이중지원 방지 원칙에 따라 기초생활수급권자들도 추가로 배제되는데, 이는 빈곤층이 차상위 계층으로 편입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선별적 복지의 모순

보편적 복지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권리적 성격으로 부여되는 복지이기에 현금 복지는 그 지급 책임이 사회에 있다. 반면, 선별적 복지는 일정한 조건에 맞을 때에 지급되는 복지이기에 심사라는 방식으로 대상자에게 증명 책임을 요구한다. 개인은 수급을 받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격 심사를 위해 사적인 정보를 공개하고 또 증명해야 한다. 현금급여는 시혜가 아니라 분명히 대상자의 권리임에도 심사 과정은 정작 대상자에게는 징벌적으로 다가온다. 정보 공개와 증명 등의 과정은 대상자의 다른 기본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 복지福祉라는 말이 삶의 질 향상을 의미함을 상기할 때, 이 사실은 큰 결점일 수밖에 없다.

선별적 복지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는 반드시 사각지대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낭비적인 비용과 심각할 정도의 인권침해 없이는 모든 사람에게 개인 사정에 맞는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명분에 대한 모순으로 작용한다. 즉 복지의 제공에 있어 심사와 선별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명분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복지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선별적 복지가 정당화될 수 있는 요건은 ‘결과적 보편성’이며, 이 요건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선별적 복지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보완을 거듭하며 또한 양적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 증가가 끝났을 때는, 인구와 복지제도의 종류 사이에 별다른 수적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또 엄격하게 강화된 심사와 관리는 개인에 대한 통제로 작용하며, 복지재정의 상당 부분이 통제 및 관리 제도의 유지에 쓰일 것이다. 선별적 복지가 ‘정말로’ 결과적 보편성을 실현하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철저한 통제 체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보편주의에서 벗어난 복지관은 복지를 사회구성원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작용하게 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선별적 복지의 이런 점과 비교할 때 기본소득의 ‘심사도 요구도 없다.’라는 점은 개별적인 사회구성원의 기본권을 옹호하며 정치ㆍ도덕적 우위를 가진다.

기본소득 재원과 기본복지 수립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와 부자 증세

한국의 기본소득 운동은 ‘새로운 재원’에 대한 논의를 반드시 포함한다. 한국의 복지 현실을 고려할 때, 기존의 현금지급형 복지를 전부 통ㆍ폐합하여 기본소득으로 전환한다 해도 최저생계비에 크게 못 미치는 액수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재원에 대해서 한국의 기본소득 운동은 비교적 명확한 합의를 하고 있는데,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와 부자 증세다.

부자 증세는 이명박 정권의 부자 감세와 대비된다. 부자 증세는 직접세의 누진율 강화와 과표 구간의 확대 등을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부자 증세는 그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규모 면에서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가 중요 재원이 될 수 있다.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 규모가 기본소득 재원으로 충분하다. 둘째, 과세를 통해 투기 불로소득을 근절하고 금융시장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는 기본소득 재원의 핵심이며, 한국에서 기본소득 도입이 신자유주의 극복에 이바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항구적인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소득 재분배 효과를 위해서도 이것이 필요하다.

2006년 전국의 땅값 총액은 5,200조 원(경실련 기준)에 달한다. 동시기 GDP의 5배가 넘는 막대한 금액이다. 증권은 2007년 11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1년간 총 2,022조 원이 거래되었고, 파생상품은 2007년 5경 4천조 원에 달했다. 기본소득네트워크의 강남훈 교수는 이에 대한 과세의 방식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이는 신자유주의 극복의 과정인데, 진보적인 재정 전략일 뿐만 아니라 금융 규제적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토지와 파생상품에 대한 중과세는 진입 규제 장벽이 된다.

교육ㆍ의료ㆍ주거ㆍ보육ㆍ노후 등의 기본복지 수립

기본소득 도입은 상당수 현금지급형 복지의 통ㆍ폐합을 의미한다. 보편적 복지는 모든 선별적 복지의 총합을 포함한다.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회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근로장려세제와 같은 제도는 불필요하다. 그 대상자들 자체가 소멸한다. 반대로 기본소득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은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기본복지라는 사회서비스 보편화 과정과 함께 확대돼야 한다. 교육ㆍ의료ㆍ주거ㆍ보육ㆍ노후 등이 이에 속한다.

교육ㆍ의료ㆍ주거ㆍ보육ㆍ노후 등이 보편적 기본소득의 부분급여로 포함된다는 것은 기본소득이 무상의료, 무상교육, 주거 공공성 등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료와 교육의 무상화를 위한 재정은 기본소득 계획에 포함되어야 하며, 주거권 보장 역시 토지 국유화에 준하는 조세 정책을 통해 - 곧 국유토지에 대한 사용료에 해당하는 높은 토지세의 징수를 통해 -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가입자 납부를 통해 운영되는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의 ‘보험’ 성격의 사회보험제도는 온전히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사회에서 이들은 독자적 현금급여로서의 의미를 소실하며, 보편적 급여에 이중 지원은 불필요하므로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장애인과 같은 특수한 조건에 있는 사회구성원에 대한 사회서비스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기본소득 도입을 통한 생계 보장만으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사회적 권리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기본소득과 최저임금

기본소득은 ‘충분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므로 최저생계비, 최저임금과 함께 논의돼야 한다. 현재 부당하게 책정된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고, 최저임금을 그에 맞추어 인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한국에서 기본소득 운동은 기본소득이 최저생계비, 최저임금과 비례적 연계를 하고 GDP증가율 또는 물가인상률과 연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과 기본소득

권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사회 안에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사회에 강제로 편입되며, 사회 의무에 따를 것을 요구받는다. 사회에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결혼, 주거 등 생활의 변동을 사회에 신고하며 관리를 허용한다. 살아가기 위해 세금을 내고, 법률에 따라 통제받는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은 이 통제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통제를 허용해야 한다. 이는 사회가 사회구성원의 생계에 대한 책임을 개인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일어나는 결과 중 하나이다. 이러한 통제는 기본소득 도입으로 상당 부분 없앨 수 있다.

국가ㆍ제도적 통제의 해소

앞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충급여방식이 노동 의욕을 저하한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근로장려세제는 노동 의욕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수입기준을 통해 한정적으로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진다. 생계급여에 의해 노동 의욕이 저하되는 효과는 의도되지 않은 것이며 동시에 불필요한 것인데, 이와 같은 효과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이라는 선별적 기준이 낳는 부작용 중 하나이다.

노동 의욕의 저하 역시 일종의 자유권에 대한 통제 중 하나라고 볼 때, 기존의 복지체제는 노동을 강요하고 포기하게 하는 통제를 동시에 행하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은 복지에 조건을 붙이지 않는 보편주의적 전환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은 노동에 대한 국가ㆍ제도적 통제를 일부분 없앤다.

자본에 의한 통제 해소

고용-피고용 관계에서 노동한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을 자본에 맡기는 것이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판매한다. 그러나 이 매매관계는 형식상 평등하나 실질적으로 평등한 관계로 볼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계’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 즉 노동 과정에서의 피 규정성과 노동 결과물로부터의 박탈에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 상태 때문에 노동자는 주체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며, 노동의 강제권을 손에 쥔 자본은 더욱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더욱 많은 시간 동안 보다 높은 강도의 노동을 강요한다. 국가별 통계에서 시간당 임금과 노동시간 수준이 반비례에 가깝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덕분에 생계가 보장된다면, 더는 노동이 곧 생계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강제적 관계는 다소 해소될 수 있다.

비자발적 실업의 해소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2천 시간이 넘는 명실상부한 OECD 노동시간 1위 국가다. 반면, 실업자 과잉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비자발적 과잉노동과 비자발적 실업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명박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 제안을 통해 이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린다. 기존의 사회구조와 고용관계를 그대로 두고 자발적 실업에 준하는 요구를 노동자들에게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생계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업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비자발적 실업을 구제한다는 구실로 비자발적 실업을 요구하는 셈이다.

기본소득은 일정한 소득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장시간 근무를 할 필요가 없어 노동시간은 단축될 수 있다. 또한, 산재의 위험 속에서 무리하게 야근, 잔업, 특근, 밤샘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서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이 감소하고, 그에 따라 일자리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어 일자리 나누기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노동자운동의 관점에서

2008년부터 NGO단체들의 주재로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에서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100나미비아달러를 매월 주민들에게 지급하는 실험인데, 1년여 동안 실업률 감소, 범죄율 감소, 노동소득 증가 등 수많은 부분에서 획기적인 개선을 증명해냈다. 이 실험이 시작될 때 누구보다 반대했던 것은 그 지역의 부자들이었다. 주민들에게 돈이 지급되면 더는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없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에 대한 담론이 약간 더 발전한 사회들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노동운동가들이 ‘노동권을 위축시킬 수 있다.’라는 이유로 기본소득을 반대하기도 한다. 이 의견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어려워진다는 부자들의 입장과 완벽하게 반대되는 주장인데, 노동권 위축을 염려하는 이들은 특별히 부자들의 입장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노동조합운동과의 관계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노동자들의 노동권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기본소득 때문에 노동자들의 권리 요구가 줄어든다고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개별적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늘어난다는 점인데, 이 주장은 ‘노동자의 권리가 올라가면 노동자들이 권리 주장을 더 하지 않을 것이므로 안 된다.’라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어려워진다는 부자들의 반대 논리와 정확히 합치한다.

더구나 기본소득은 노동운동가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고, 파업기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어려움을 일정부분 해결한다는 장점도 있다.

기본소득이 보조임금?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부당한 노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자본의 낮은 임금부담을 보조하는 역할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기본소득의 원칙 자체를 무시한 주장이다. 보조임금 성격의 소득 지원을 통해 노동자가 저임금 노동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총임금(임금+보조임금)으로 생계가 가능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소득 지원만으로는 생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연계복지Workfare가 아닌 이상 보편적 복지에 대해 보조임금의 혐의를 부여하려면, 그 ‘액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따라서 ‘충분하지 않은 기본소득’에 대해 보조임금을 문제 삼을 수는 있으나, 기본소득의 정의에 ‘생계를 보장하여야 한다.’라는 원칙이 있음을 고려하면 기본소득이야말로 보조임금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보조임금 논란에 있어서 더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보조임금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근로장려세제EITC와 같은 제도라는 점이다. ‘노동자에게만 주어지는 급여’가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는 셈인데, 그렇다고 해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같은 - 그 대상층이 ‘노동자’만이 아니어서 근로장려세제와 반대되는 - 급여가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따라서 보편주의 복지에 대한 반대논리로 노동자의 권리 위축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비판이다.

기본소득은 새로운 사회운동을 가능하게 할까?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 제안은 불편하지도 불리하지도 않다. 그것은 반反이명박 운동보다 대안적이고, 총고용 보장운동보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대안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

정권의 변덕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요구는 대중의 지지 없이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한 사회운동은 대체로 그 요구가 명확하고 알기 쉽다. 알기 쉬운 것이야말로 전파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구를 하는 것보다 무언가에 ‘반대’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게 많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요구가 명확하며, 전파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운동은 빠르게 절명하기도 한다. 반대 이후의 합의를 운동 안에서 새롭게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의 논의는 마치 이미 합의된 것 안에서의 논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새로운 합의의 시점이다. 결국, 반대운동은 고착상태에서 새로운 운동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 하는 위기에 빠진다.

기본소득은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 어떤 복잡하고 어려운 요구보다도 많은 것에 대한 대안을 담고 있다. 뛰어난 전파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서 모든 요구를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가능한가?

기본소득이 과연 현실적인 주장이냐는 물음에는 ‘되도록 현실적인 것을 주장해야 한다.’라는 뜻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존의 운동에 대해 다시 반문할 수밖에 없다. ‘완전고용, 가능한가?’라고.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주장은 기본소득 없는 완전고용 주장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고용노동은 그것이 공동체의 번영에 이바지할 때만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노동을 오직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만들어낸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완전고용을
이룬다면 그것이 정말 자축할 일일까?

중국과 베트남은 그런 방식의 일자리 창출에 매우 특화된 국가에 속한다. 중국은 고용을 늘리기 위해 중기계 사용에 제한을 두고, 베트남은 상당한 부분에서 전산화를 거부했다. 그 결과 굴착기로 팔 땅을 삽으로 파고, 엔터키를 대신해 우체국으로 달려가는 노동자들이 양산되었다. 그들은 그 노동에 보람을 느낄까? 아니다. 그들도 그 노동을 다른 방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사회가 ‘그냥 주기 싫어서’ 불필요한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해 그들도 충분히 불만을 느끼고 있다.

굳이 그처럼 극단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기술의 진보는 일자리를 점점 줄이고 있고, 대운하를 파지 않는 이상 실업 확산을 막을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기술 혁신의 효과로 경제 규모가 늘고, 그에 따른 추가 고용이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자리 축소가 일어난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소득을 위해 불필요한 노동을 받아들여야 할까? 소득과 노동은 반드시 연계되어야 하는가? 오로지 사회나 자본의 제어에 따라 임금노동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만 생존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이비 신앙은 20세기의 쓰레기통에나 보관되어야 한다. 20세기에 이미 ‘모두에게 1,500마르크씩을!’이라고 주장했던 독일의 노동자들처럼, ‘조건 없는 소득’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외칠 수 있다. 정부와 자본을 상대로, 짧고 쉽고 명쾌하게, “돈 내놔!”라고.

국민주권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확립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

국민주권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찾아

한국 현대사는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투쟁해 온 역사다. 4ㆍ19혁명, 5ㆍ18광주민중항쟁, 그리고 1987년 6ㆍ10항쟁을 지나며 직선제가 도입됨으로써 비로소 절차적 민주주의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 이상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고, 그 결과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은 형식적인 수준으로 전락했다.

사회 양극화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인 국민의 사회경제적 최소공통성을 파괴한다. 1997년 이후의 신자유주의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공문구로 만들었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이 단지 투표일에 1인 1표를 행사하는 것에 불과한 체제에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은 민주주의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인식된다. 경제적으로 배제된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무관심해지고, 급기야는 정치적 참여의 실질적 조건을 상실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배제되었다.

결국,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주권이 명문화되어 있지만, 실제로 권리와 의무는 같게 주지 않는다. 권리적 측면에서 우리는 선별 당하고 차등하게 취급되지만, 의무는 평등하게 나누어 받는다. 권리의 불평등은 의무에 있어서도 ‘결과적 불평등’을 낳는다. 더 많은 권리를 보유한 자는 더 많이 의무를 회피할 수 있고, 더 적은 권리를 가진 자는 상위 권력자들이 회피한 의무마저 자동으로 나누어 받는다. 차등한 권리는 권리의 양극화를 가속한다. 이 양극화는 가계를 통해,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는 방식으로 영속성을 띈다.

이명박 정부를 향해 많은 이들이 ‘독재’, ‘민주주의 후퇴’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가 민주주의를 정말 후퇴시켰는가?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사회가 합법적으로 국민주권을 봉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원리 안에서는 국민주권이 현실사회를 통제하며, 체제가 붕괴하지 않는 한 주권은 불능상태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은 현실에 의해 약화하지 않으며, 재력과 신분에 좌우되지 않는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적어도 형식적으로 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국민주권을 정지한 바는 없다. 그런데 상사에 의해 투표소에 갈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회, 재력 탓에 선거권마저 봉쇄되는 사회, 상사의 협박에 의해 구사대로 발탁되어 정치적 양심의 자유를 압류당하는 사회, ‘자유주의’를 떠드는 이들은 이러한 구조란 ‘어쩔 수 없는 것’,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민주주의는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돈이 국민주권보다 상위 권력임을 인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독재에 대한 인정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주권은 국민 모두의 복지라는 사회경제적인 기본 조건이 충족된 경우에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복지의 후퇴는 곧 민주주의 후퇴를 의미한다. 그래서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보편적이고 충분한 복지를 국민에게 보장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국가는 마땅히 이를 보장할 모든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기본소득은 민주공화국의 모든 국민에게 그들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권자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물질적 독립을 보장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민주주의 운동이다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모든 개인의 주권은 모든 개인의 독립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권리는 그 권리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수반되어야만 온전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는 물질적 독립으로부터 비롯되고, 따라서 개인의 권리 역시 물질적 독립으로부터 비롯된다. 임금노동을 중단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 고용주에 의해 빈곤선이 결정되는 사회는, 모든 개인의 사회적 권리가 그의 고용주에게 몰수당해 있는 사회이다.

물질적 독립이 민주주의 사회의 실질적 기반 요소임을 고려할 때, 기본소득 도입은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휘장 아래 정권의 교체나 정치가들의 변덕에 의해 민주회복과 파괴를 반복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양극화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로 반민주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세심한 부분에서 반민주성을 실현해나간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사회구성원이라는 보편적 자격에 따라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원리와 같은 원리에 입각한 복지 제도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 운동 자체다.

질문과 답변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돈을 주나요?

사람들은 누구나 일을 합니다. 단지 고용되어 임금노동을 하는가 아닌가, 또는 그의 일의 결과물이 사회에서 현금으로 교환될 수 있는 ‘노동’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기본소득은 재생산 영역에서 수행되어서 시장에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여러 일, 그림자 노동에 대한 보상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비자발적인 실업자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시대입니다. 기술 혁신으로 노동자가 해고되는 시대입니다. 그들에게 과연 돈을 주지 말아야 할까요?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하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자발적 실업자들이 생겨날 수 있지만, 이것은 기본소득의 부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생활이 보장된다면 비참하고 비윤리적이거나 적절한 가치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임금노동은 노동자들로부터 외면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임금 수준과 노동인권 수준을 향상시키고, 결과적으로 보편적인 노동환경 개선을 불러올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재원은 어디서 나오나요?

기본소득의 초기 주요재원은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와 소득세ㆍ법인세 등의 인상을 포함한 부자 증세입니다. 이를 통해 투기 불로소득을 점차 없애고, 진보적 조세 체계를 확립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존의 복잡한 복지 전달 체계를 간소화하여 추가 재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려운데,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복지와 경제는 반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2010년부터 시민기본소득제가 시행되는 브라질은 볼사 파밀리아 Bolsa Familia 라는 빈민지원 정책을 시행한 결과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되고, 실업률이 감소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기본소득은 가장 보편적인 소득 재분배 방식입니다. 분배를 거부하는 성장은 지표상의 숫자를 통해 선진국의 국민이라는 허영심을 안겨주는 것 외에는, 개인과 경제공동체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최저임금제가 폐지되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등 노동조건이 악화되지 않을까요?

기본소득과 노동 조건은 교환대상이 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노동자 개인의 교섭력이 강화되어,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권리 주장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본가들은 최저임금제의 폐지와 비정규직 양산을 원할 것입니다만, 기본소득 도입과 그것을 맞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물가가 오르지 않을까요?

기본소득은 물가인상률을 반영하여 인상되므로, 물가인상 자체가 기본소득 수급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없습니다. 또한, 사회경제적으로도 묶여 있던 돈이 순환되면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있지만, 화폐발행 자체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므로 전체적인 인플레이션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한편, 수요의 증가 원인은 대부분 공급량을 쉽게 늘릴 수 있는 저소득층의 생필품 수요이기 때문에, 공급이 증가하면서 일자리도 늘어나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인플레이션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증세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하면 부자들의 저항이 심하지 않을까요?

서민에게 유리한 어떠한 정책을 도입하건, 부자들의 저항은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복지정책은 부자 증세 없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부유층의 반발을 필연적으로 불러옵니다. 기본소득은 개별 노동자의 교섭력을 강화하고, 국민을 생활고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힘이 됩니다. 충분한(또는 후한) 수준의 기본소득은 부자들의 조세 저항에 맞설 힘을 모든 국민에게 부여할 것입니다. 또한, 기본소득이 서민 중심의 내수경제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내수형 소기업들을 포함하여 담세층이 더욱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도입되었다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소득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나요?

외국에서는 주로 좌파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주도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에 가입한 나라는 현재 16개국입니다. 한국에서는 다수의 진보적 학자와 사회운동가들이 기본소득을 적극 지지하고 있으며, 사회당에서는 기본소득위원회 설치, 기본소득 신문 발행 등을 통해 기본소득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기본소득네트워크’ (http://cafe.daum.net/basicincome)는 BIEN Basic Income Earth Network 회원국 가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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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 목
공지 [행사] 2015년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지역정치와 기본소득> 동영상
16 [자료집] 2012 기본소득 국제대회 금융자본주의를 점령하라 (2012년 3월 16~18일)
15 [자료집] 생태 토지세 문화와 기본소득 (2011년 6월 3일)
14 [자료집] 청년 예술 불안정노동과 기본소득 (2011년 4월 27일, 홍대앞 두리반)
13 [자료집] 기본소득,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 (2011년 2월 17일)
12 [속기록] 기본소득,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 (2011년 2월 17일)
11 [보도자료+속기록] 제1회 한국ㆍ일본 기본소득네트워크 공동 심포지엄 (2010년 8월 19일)
10 [기사] 기본소득과 노동자운동 토론회 (2010년 5월 7일)
9 [자료집] 기본소득과 여성 토론회 (2010년 3월 8일)
8 [자료집] 2010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글로벌시대의 지속가능한 유토피아와 기본소득' (2010년 1월 28일)
7 [자료집] 2010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2010년 1월 27일)
6 [소책자] 기본소득 도입이 필요합니다 (2009년 11월 1일, 권문석 금민 김성일)
5 [번역] 기본소득의 역사 (2009년 3월 27일, 최광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웹사이트 번역)
4 자료실 이용 안내
3 [속기록] 기본소득제도의 사회대안적 가능성, 사회대안포럼 제3회 심포지엄 (2009년 1월 22일) (1)
2 [논문] 판 빠레이스의 유토피아적 맑스주의와 21세기 꼬뮨주의 (2008년 3월 5일, 곽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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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한국 네트워크 / basicincome@copyLeft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