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제목 |
돌아오지 않는 1달러 |
글쓴이 |
retelf |
등록일 |
14-02-20 12:21 |
필자는 기본소득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기본소득 찬성론자이다. 필자는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기본소득이라는 용어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는 작년 가을쯤 책을 하나 집필했는데 그 이후에야 기본소득이란 단어를 듣게 되었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가서 금민 운영위원장님의 근황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basicincom.kr 이라는 인터넷 주소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 사이트에 들어와 이것저것을 살펴보고 나서 기본소득이 내가 집필을 완료한 책 속의 내용 중 일부분과 그 내용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을 알지 못했던 필자는 여기에 '자유노동'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이 명칭은 - 돈을 받는 측면이 아닌 - 그 돈을 받고 난 다음의 활동의 측면에서 기본소득을 정의한 명칭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기본소득의 개념과 필자 혼자만이 사용하는 자유노동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그 내용이 같다. 한가지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면 기본소득은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유지한 상태에서 청빈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임에 반하여 필자의 자유노동은 현재의 경제시스템 중 화폐의 회전 부분을 개조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풍요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사이트 어딘가에서 필자가 추구하는 기본소득은 1인당 연간 10만달러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바로 그러한 화폐(정확히는 소득)의 회전과 유출입 통제를 기반으로 제시하는 액수였다. 하지만 기본소득도 좋다. 청빈한 자유 정도로 출발해도 좋다. 이미 이 세상이 이룩한 물리적 1인당 달성가능 소득수준인 10만달러가 아니라,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전제로 하여 이에 단순한 기본소득제의 적용을 통한 1인당 연 5000달러의 기본소득도 할만은 하다. 그리고 이것은 제2단계의 기본소득, 즉 청빈한 기본소득이라는 제1단계 기본소득을 넘어선 그 다음의 완성단계인 풍요한 기본소득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제1단계의 청빈한 기본소득을 먼저 확보하는데 일조를 해 볼까 하고 최근 이곳 광장 사이트에서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려 보았다. 이제는 김이 좀 모락모락 나는 상태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요리사가 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참치 요리사이다. 하지만 어부가 바다에서 참치를 잡아오지 못하면 그의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서 요리사는 정치이고 어부는 경제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요리사가 아니라 어부다. 아무리 분배를 잘해도 애당초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는 굶주린 자들의 아귀다툼이 끊일 수가 없다. 그러니 정치가를 욕하지 마라. 정치가들이나 민중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다. 입장을 바꾸어 놓으면 결국 똑같은 행태를 보이게 된다. 적어도 일반 민중들보다는 무엇이 더 나아도 나은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정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다보면 어쩔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 민중은 막상 맡겨 놓으면 하면 더했지 덜 할 사람들이 아니다. 부정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는 민중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를 견주주의라 부른다.
좌파들의 눈에는 자본이 쌓아놓은 산더미같은 부가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퇴장된 축적량이 아니라 회전하는 순환량이다. 그 축적량을 빼앗아 오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터치하지 않는다. 마음껏 빼앗아 오기 바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고 본질적인 측면이 있다. 순환량을 증가시키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빼앗아 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순환량을 증진시키는 데에는 손 놓고 있다면 그것은 유치하다.
퇴장된 축적량이 아무리 많아도, 파생금융자산이 천문학적이라 하더라도, 일단 그것은 순환량과는 별개의 개념이다. 자본의 축적량을 빼앗아 와도 그것이 다시 노동이나 민중과 같은 다른 곳으로 퇴장되어 축적이 되어 버린다면 결국 순환량은 메말라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도루아미타불의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피의 혁명이 수반되게 된다. 피의 혁명과 도루아미타불, 그것이 지난 100년간의 인류 역사였다.
우리가 제1순위로 주의를 집중할 곳은 퇴장된 축적량이 아니라 메말라 있는 순환량이다. 그리고 이 순환량 기근의 주범은 의외로 자본이 아니라 민중이다. 손주의 미래를 위하여 쌈지돈을 챙기는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손주를 실업자로 만들어버리는 악마의 저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절약의 역설은 이미 80년 전에 나온 구태의연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세상 경제는 절약의 역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정말 신기한 것은 주류경제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며 그 해답을 절약의 역설 그 자체에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유수한 노벨상 수상자들과 엘리트 경제관료들이 이 문제에 대한 처방을 제시해왔으나 그 모두가 실패했다. 내가 소비한 1달러가 다시 나의 임금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 자본의 호주머니가 되었건 민중의 호주머니가 되었건 또한 예금의 형태가 되었건 부동산과 같은 자산구입의 형태가 되었던 간에 - 그 1달러가 퇴장하고 다시 나의 임금 1달러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이 단순한 현상을 아직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이 시대의 메시아다. 문제는 간단하며 앞 전 달팽이산책님의 <기본소득의 당위성시리즈 - 01 사회적 배경>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산만하지 않다. 그 모든 산만함의 근원에 바로 그 돌아오지 않는 1달러가 도사리고 있다.
제1단계 기본소득, 즉 청빈한 기본소득은 이러한 돌아오지 않는 1달러의 심장판막증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추진하는 기본소득이다. 만약 그 질환을 치유하게 되면 제2단계 기본소득, 즉 풍요로운 기본소득, 1인당 연 10만달러의 기본소득을 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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