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사용설명서] 기본소득과 함께 생태사회로
권정임 / 한신대 연구교수
중앙대 대학원신문 [294호] 2012년 10월 25일 (목)
무조건적 기본소득’이란 별도의 자격 심사 없이 누구에게나, 원칙상 생계 유지에 충분하게 지급되는 현금 및 현물기본소득이다. 그 기원은 16세기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사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8운동과 신사회운동을 거치면서 80년대 이후 다시 활성화되는 현대 기본소득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유토피아적인 꿈을 넘어 그 실현가능성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된다는 점이다. 또한 노동운동이나 여성해방운동 같은 현대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운동들이 합류해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이론적겱플돛� 장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고르츠나 초기 빤 빠레이스가 보여주듯이 현대 기본소득논의를 촉발시키면서 논의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운동은 생태운동이다. 나아가 생태운동 진영에서 제기하는 기본소득모형은 그중 실현가능성이 가장 높은 모형이기도 하다. 이는 천연자원으로부터 생기는 수입을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이 알래스카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생태운동과 기본소득운동의 관계부터 살펴보자.
생태운동과 기본소득
68운동을 기점으로 촉발되는 생태운동의 관점에 설 때, 기본소득은 다수의 생계가 자본의 일자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강제’를 해체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노동력의 탈상품화’(블라슈케)에 기초할 때에만, 핵산업을 비롯한 반생태적인 산업의 해체 및 생태친화적인 산업구조로의 전환과 관련해 ‘일자리의 감축’에 대한 우려에서 기인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성장에 의한 고용창출과 실업해결이라는 미명 아래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반생태적인 성장이데올로기를 해체해 생태사회로의 전환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게다가 기본소득의 지급은 개인이 ‘보다 좋은 일자리’를 선택해 노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보다 좋은 일자리는 단지 노동조건이 좋은 일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일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지급은 생태친화적인 일자리를 확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의 지급은 노동시간의 감축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고르츠가 강조하듯이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더욱 강화될 수 있다. 그 결과 각 개인이 정신적, 지적, 예술적 발전이나 사회적, 정치적 참여에 종사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자유로운 시간이 물질적 수단과 함께 제공된다. 이는 각 개인의 생태적인 의식의 함양과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더불어 이러한 활성화는 생활 방식과 가치관, 곧 문화 전반의 생태화를 촉진해 경제 전반의 생태친화적 재구성과 상호증폭작용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생태 사회 형성과 기본소득지급효과 간의 연관성으로 인해 현재 서구 녹색당의 다수는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불로투기소득에 대한 고율의 조세에 기초하는 기본소득이 지급돼야 윤리적, 경제적으로 올바르다. 전체 사회성원의 1%에 불과한 자본가와 금융귀족이 ‘생산과정 내부에서의 직접적인 빼앗음’, 곧 ‘착취’에 기초하는 자본가 이득과 ‘생산과정 외부에서의 간접적인 빼앗음’, 곧 ‘수탈’에 기초하는 이자, 지대, 금융/부동산 투기소득, 공적 자금 수취로 구성되는 거대한 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연자원이나 과학기술, 사회간접자본 같은 전승된 인류의 공적 유산을 사실상 자본 또는 특정 개인들이 독점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탈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기본소득이 지급돼야 하는 근거가 된다. 이때 특히 생산에 대한 자연자원의 기여에서 유래하는 부를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 곧 생태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생태운동 진영에서 제기되는 논의의 주요 쟁점을 이룬다.
생태기본소득과 생태사회로의 이행
맑스가 말하듯이 그 누구도 지구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부각할 때, 자연의 공동소유권에 대한 주장은 이미 16세기부터 자연에서 유래하는 부의 일부를 공공의 몫으로 모두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 즉 생태기본소득의 근거로 제시된다. 16세기의 비브스와 18세기의 페인, 19세기의 헨리 조지 등에게서 생태기본소득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헨리 조지를 계승하고자 하는 지공주의자들, 로버트슨, 데일리 및 유럽 녹색당 다수에 의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생태기본소득론을 통합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기본 논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모든 인류가 자연을 평등하게 향유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말처럼 자연을 보다 개선하여 미래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의무 역시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는 자연자원의 배타적 사용에서 유래하는 ‘부’의 일부를 생태기본소득의 형태로 모두에게 이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자원의 사용에서 유래하는 ‘부’의 또 다른 일부를 생태친화적 대체제의 개발을 비롯한 해당자원의 생태친화적 재생산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때 전체 자원의 생태친화적 재생산은 현물생태기본소득 그 자체의 한 부분을 형성하게 된다. 나아가 생태기본소득을 모두가 받는다는 사실은 자연에 대한 공유의식과 생태의식을 함양시켜 사회경제 및 문화의 생태친화적 재생산이 더욱 진작되는 효과를 낳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화석연료처럼 자원 사용에 대해 특별한 통제가 필요한 경우, 생태세를 부가해 자원의 사용을 절감하고 아울러 생태세수를 생태기본소득과 생태적 재생산분으로 분할해 사용할 수 있다. 생태세수에 기초하는 생태기본소득은 결국 기본소득이 가지는 특수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연에서 유래하는 부의 대부분이 자본의 이득으로 합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실상 생태세수에 기초하는 생태기본소득만이 시행 가능하다. 이처럼 제한적으로 실시되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생태세가 기본소득과 결합하여 실시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생태세 자체의 도입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생태세의 역진적인 성격이 생태기본소득의 지급을 통해 상쇄되면서 생태세의 도입에 대한 동의를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데일리나 로버트슨 및 서구 녹색당의 대부분은 생태세와 기본소득을 결합한 생태기본소득의 도입을 주장한다. 최근 강남훈이 주장하듯이, 전기 사용에 대한 생태세에 기초하는 생태기본소득의 실시는 전기사용량의 절감을 통한 핵발전소의 폐기라는 탈핵을 위한 효과적인 방책일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생태세 실시의 ‘생태적’ 효과가 자연자원 사용의 절약 차원을 넘어 해당 자연의 생태친화적 재생산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생태세수 전부가 생태기본소득으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충분한 양이 생태친화적 재생산을 위해 투자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본소득의 재원이 충분해야 한다. 생계유지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을 때 생태정책에 대한 광범한 동의는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생태기본소득은 무엇보다 불로투기소득을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과 결합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첫째, 기본소득의 재원을 풍부하게 하여 생태세수가 자연자원의 생태친화적 재생산을 위해 충분히 사용되게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급락한 지가와 주가 등에 기초해 자연 및 사회적 자원의 공유를 촉진하며, 자연에서 유래하는 부의 일부가 체계적으로 생태기본소득과 생태적 재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생태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