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간단하고 강력한, 하지만 불온한...
안효상(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
만일 그 자리에 어떤 시인이 참석했다면, 이렇게 노래할 수도 있었겠다. “이렇게 모두 모였구나!” 비단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주장하는 주요한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곳곳에서 말 그대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다양한 보통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월 23일 오후, 홍대입구에 있는 가톨릭청년회관 5층 강당에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이 가슴에 담고, 목소리로 낸 것은 “모두에게 기본소득! 모두 함께 공동행동!”이었다. 이날
열린 것은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다양하면서도 주요한 흐름을 한 자리에 모아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본소득 공동행동 발족식이었다. 1월부터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홍세화(‘말과 활’ 발행인), 강남훈(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금민(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등이 공동행동을 위한 제안문을 널리 돌렸고, 거기에 1천 명 이상이 서명을 하면서 발족식의 토대가 되었다.
이날 행사는 세 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우선 기본소득 공동행동을
위한 심포지엄이 있었다. 심포지엄은 필자의 사회로 김종철, 홍세화, 강남훈이 참석했다. 다음으로 금민 운영위원장이 기본소득 공동행동의
전망과 계획에 대한 발표가 있었으며, 끝으로 ‘기본소득 공동행동
선언’을 채택하고 공동대표단과 집행위원장을 선임했으며, ‘선언’의 낭독으로 행사의 막을 내렸다. ‘선언’은 뜻 깊게도 연대의 마음으로 참가한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의 주원이 함께 낭독해주었다.
발족식의 앞부분에 심포지엄을 넣은 것은 의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제법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 기본소득 운동은 각각 맑스주의 경제학과 맑스주의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강남훈 교수와 곽노완 교수가 이론적으로 시작했으며, 이와 별도로 2007년 대선에서 한국사회당의 금민 후보가 기본소득을
정책으로 내건 게 정치적 출발이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왼쪽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한편으로 전통적 좌파와 소소한 전투를 치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와 간헐적이지만 직접적인 전선을 형성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더 나아가 불안정 노동 체제가 자리 잡아가고, 이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청년층, 노동운동의 일부, 문화예술계
등으로 이 아이디어가 퍼져나간 것과 별도로 ‘녹색평론’의 분투와 후쿠시마 이후의 분노 속에서 이른바 녹색당과 녹색 진영에서 탈핵 운동과 함께 기본소득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이런 흐름이 문명의 전환, 체제의 전환, 정치 운동과 사회 운동의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만난 것이 기본소득 공동행동이었다. 따라서 각기 출발점이 다르고 경과점도 다른 흐름이 만났기에 인민전선의 강령을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과정이
필요했고, 이를 심포지엄으로 담으려 했던 것이다.
토론은 세 사람이 기본소득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무엇에 주목하는지
등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은 풀뿌리
운동의 맥락에서 지역 화폐에 대한 관심에서 기본소득과 만났다고 한다. 화폐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는데,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해악을 극복하기 위해 은행의 신용 창출 기능과 이자를 없애고
국가 화폐로 전환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한 사회의 모든 경제적 성과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결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국민 배당금’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사람에게 돈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명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순한 것을 주장할 때만 정치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과활’의 홍세화는 아직 기본소득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한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만났을 때 딱 감이 왔다는 말로 강렬함을 드러냈다. 굴종에서 벗어나고, 우리 시대에 점점 더 커지는 불안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발현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말한다. 여기에 더해 노동의 지위 변화, 생태적 위기 등도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했다고 한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강남훈은 곽노완 교수를 통해 기본소득의 아이디어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 상황에서 매우 참신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매우 개인적인 (하지만 일반적인) 삶의 경험에서 나온다. 특히 한국처럼 복지 제도가 미비한 나라에서는
가족 구성원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그게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럴 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이런 일 자체가 긍정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치론을 공부한 경제학자로서 소련의 붕괴 이후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본소득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국가사회주의와 시장사회주의 모두를 넘어서서 새로운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국가나 시장으로부터 감시나 인정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사회가 인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매우 짧게 요약했지만 실제 세 사람이 말한 것은 심포지엄이라는 형식을 감안하면 매우 길었다. 그러다 보니 질문자로서 사회자가 의도한 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원래
하고자 했던 질문의 진행은 개인들의 경험에 기초하면서도 기본소득의 필요성, 정당성, 가능성을 짚어보고, 이를 현실화시키는 공동행동의 긴급성으로 마무리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모두 발언이 이미 여러 토픽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회자로서는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음 주제는 기본소득을 다른 진보적인 제안이나 구상과 비교하면서 그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먼저 발언에 나선 홍세화는 기본소득이 인간의 다섯 가지 필요 혹은 뒤집으면 불안 요인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는 독일이나 핀란드처럼 복지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는 나라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가 높다는 것으로 간접 증명된다고 말한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열변으로 이야기의 물길로 잡아가는
김종철은 기본소득은 분명 매력적이고 강력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제대로 시행해 보지 못한 것이니 겸손한 자세로, 다양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어놓고 보아야 한다는 말로 시작했다. 이는 현실 지형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가장 큰
반대가 복지 운동 진영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과 태도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복지국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까지 거둔 것은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 복지국가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며, 주체적 선택이라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끝으로 강남훈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협동조합에 대한 우려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협동조합이 미래 생산양식의 씨앗이 될 수 있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는
한에서 그렇다고 한다. 협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조합원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원칙으로 움직이며, 그렇기 때문에 시장사회주의가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협동조합이 미래 생산양식의 주축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과 같이 협동조합의 활동을 사회적으로 뒷받침하고, 이를
통해 협동조합의 활동이 사회적인 지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국유, 공유, 민간 부문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노벨경제학상을 받기도 했던 영국의 제임스 미드가 주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덧붙여 강남훈에게는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에 관한 질문을 추가로 했다. 기본소득을 30만 원 정도 지급한다고 하면 필요한 재원은 1년에 150조 원이다. 커 보이긴 하지만 한국의 GDP가 1,500조 원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렇게 큰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20퍼센트 대 후반인 담세율을 유럽 평균 수준인 30퍼센트
대 후반으로 올리면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끝으로 마지막 발언을 홍세화가 해 주었다. 기본소득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진보 진영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제부턴가 진보 진영 사람들은 설득을 멈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외연 확장도 되지 않고, 그저 조직 동원의 논리로만 운동이
이루어진다고 비판하는 홍세화는 앞으로 설득을 화두로 진보 진영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기본소득이
설득의 주요한 동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기본소득 운동은 그 자체에 대한 연구와 함께 동심원을 그리듯 조금씩 외연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기본소득의 정의와 재원이 주요한 토픽이 되었다. 기본소득이
낯선 담론이자 개념이라는 점 그리고 복지국가도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현실에서 어쩌면 당연한 경과점이었다. 따라서 ‘설득’이 주된 태도였다. 하지만
이날 심포지엄에 나온 세 사람은 설득은 포기하지는 않지만, 좀 더 논쟁적인 방식으로 기본소득 운동을
펴나가야 한다는 생각의 공통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지향점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부문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생산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은 단순하지만, 강력하고 불온하다.
심포지엄에 이어서 진행된 2부의 설명회는 이렇게 단순하지만 강력하고, 불온하기까지 한 기본소득이야말로 노동자운동과 녹색운동, 반빈곤운동과
협동조합운동, 청년운동과 여성운동, 문화운동과 시민운동의 ‘공통의제’이며, 궁극적으로
사회구성원 모두의 ‘보편의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기본소득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와 같은 전망을 담은 것이 ‘기본소득공동행동 선언’이다. 이 선언이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인지 한갓 에피소드로 그칠 것인지는
그날 참여한 모든 이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