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세 모녀 자살과 기본소득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가수 윤영배씨가 ‘한국의 그래미상’으로 불리는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소감에서 ‘세 모녀 자살 사고’를 언급하고 ‘기본소득론’을 역설했다고 한다. 3관왕을 했으니 세 번 불려 나갔을 텐데, 세 번 다 기본소득 이야기를 하니 객석에서 웃음과 환호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얼마간의 기본적 필요를 해결할 돈을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발상을 듣게 되면 맹랑한 소리라고 일소에 부쳐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윤영배씨의 거듭된 제안에 터져나왔다는 객석의 웃음에도 그런 의미가 어느 정도는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명쯤 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 중에 기본소득을 지지한 이가 1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느낌이 좀 달라질 것이다. 기본소득론은 이미 서구 진보진영에서 오랫동안 깊이 토론된 의제이고, 지난해 스위스에서는 12만명이 서명한 ‘월 300만원 기본소득 보장’ 안건이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 앉혀준 기초연금은 노인들에 대한 기본소득이다. 이명박의 반값등록금 약속은 대학생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으며, 지난 4~5년간 한국 정치를 뒤흔들었고, 논란의 와중에서 오세훈을 몰락시키고 박원순과 안철수를 불러낸 무상급식은 학부모에 대한 기본소득이다. 요컨대 기본소득은 이들을 엮어서 모두에게 차별 없이, 삶의 기본적 필요를 해결할, 작지만 의미 있는 소득을 제공하자는 논리인 것이다.
왜 꼭 그러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세 모녀 자살 사고와 같은, 사회 붕괴의 조짐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부의 형성과 분배에 관한 사회적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삼성 스마트폰으로 거둔 천문학적인 수익을 왜 이건희와 주주들만 가져가야 하는가? 삼성 스마트폰은 이건희와 삼성 직원들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지난 수천년 쌓아온 수학의 성과에 가장 크게 기대고 있고, 따라서 12세기 중동의 어느 이슬람사원 서고에 쌓여 있는 수학 관계 고대 문헌을 정리한 어느 수도승에게도 빚지고 있는 것이며,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낸 수억년의 지질형성운동에도 빚지고 있으며, 반도체 칩을 만들며 유독성 화학물질을 들이마시다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황유미에게도 빚지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부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모두의 것일진대, 그 끄트머리에서 자본을 댄 소수 주주와 경영자와 직원(그것도 정규직)들이 독점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것이다.
공산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할 기독교인들이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론은 예수님이 원조이다. 일거리가 없어 놀다가 저물녘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먼저 와서 일한 자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포도원 주인 비유야말로 기본소득론의 핵심적인 논리를 꿰뚫고 있다. 누구나 삶의 기본적 필요를 충당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제공받을 당당한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재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기업과 대토지 소유자들이 부당하게 편취한 소득에 대해 서구 수준, 아니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과세하더라도, 그리고 국가와 지방정부가 은행에 기대어 발행하는 채권 대신 한국은행권과 태환되는 공공통화를 발행하더라도 너끈히 조달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현금이라는 동아줄을 붙잡기 위해 너나없이 돌진해야 하는 이 노예적 삶의 성채에 쩍쩍 금이 갈라질 것이다. 세 모녀는 집세를 내고 어둑한 방에서나마 밥을 지어 먹으며 그들 나름의 다복한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안이 없다고들 말하지 말라. 대안은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세 모녀 사건을 이렇게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