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5-22 04:01
[사회] [2009 한국사회포럼] 왜 기본소득이어야 하는가?
 글쓴이 : 사무처
조회 : 2,435  
   양의모발제문.hwp (42.5K) [15] DATE : 2014-05-22 04:01:53
권문석|조회 119|추천 0|2009.08.31. 11:49http://cafe.daum.net/basicincome/3ol8/69 

2009년 8월 27일 오후 5시, 서강대학교 다산관 301호에서 개최된

2009 한국사회포럼 '한국사회 이중 위기와 기본소득' 자유토론에서

양의모(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님이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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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양의모발제문.hwp

 

왜 기본소득이어야 하는가?

 

 

양의모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1. 들어가기

 

최근 한국사회를 흔들었던 쌍용차사태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국의 IMF시대,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10년’ 그리고 현재의 ‘미국발 금융위기’로 이어지는 거듭되는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거듭되는 구조조정에 의한 고용위기 이에 대처하는 노동운동의 한계가 쌍용차사태라는 사건에서 집약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고용이 감소되거나 악화되어 대중의 구매력이 약화되고 이로 인해 전체적인 유효수요의 감소가 일어나고 이것이 다시 경기를 하락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는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고 앞으로도 제2, 제3의 쌍용차사태가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게만 느껴진다. 기본소득이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 또한 여기에 있다 하겠다.

 

 

2. 경제위기와 고용악화의 악순환의 배경

 

(1) 중산층의 위기

 

경제를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산층의 소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흔히들 “부자들이 지갑을 열어야 경제가 산다”는 말을 하지만 부자들의 지갑은 경제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고 볼 수는 없다. 오죽하면 부자들 사이에 ‘이대로족’이 출현하겠는가? 물론 중산층의 몰락이 그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의 소득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부자들의 소비가 경제상황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중산층에 의해 부자들의 소비가 영향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산층 위기는 전반적 수요의 감소를 통한 경제위기를 가져오고 경제위기는 고용악화를 통하여 또 다시 중산층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이 지속되어 왔다고 할 것이다.

 

중산층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비정규직의 증가라고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걸작품(?)이라고 할 ‘비정규직’의 증가는 안정된 소득에 기반을 두는 중산층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인간의 소비는 안정된 소득의 보장이 이루어질 때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상식이며 비정규직의 증가는 중산층의 수입의 불안정화와 전반적 소비 위축을 가져왔다. 이것은 중산층의 소비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영세 자영업자의 수입 감소로 이어지고 결국 전사회적 소득과 수요의 감소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경기의 침체를 불러 고용감소와 고용악화로 이어지게 된다. 전 사회적 수요 감소로 인한 경기악화는 필연적으로 각 기업의 구조조정을 야기해 고용감소 고용악화를 낳게 한다. 이는 또다시 중산층의 소득과 수요를 감소시켜 경기악화를 가중시키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악순환을 가져오게 하는 중산층의 위기와 그 원인이 되는 비정규직의 증가를 가져온 것은 과연 무엇일까?

 

(2) 20세기의 괴물 신자유주의

 

경쟁과 효율을 기본교리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18-19세기를 풍미한 자유주의의 망령을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구현하려고 오늘도 광분하고 있다. 헤비급선수와 라이트급 선수가 같은 링에서 같은 룰을 가지고 싸워야 하고 10살짜리 꼬마가 20살짜리 청년과 아무런 조건 없이 싸워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이념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오늘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신봉자들을 늘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경쟁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비정규직의 증가를 통한 원가 절감이야말로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유일무이한 대안이라 강변하는 신자유주의의 출현의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급속히 진행되는 기술혁신을 들 수 있다. 이른바 정보혁명의 이름하에 진행되는 현대의 기술혁신은 가히 19세기 산업혁명시대에 필적할만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정보혁명은 고용의 감소와 노동의 단순화를 가져오게 되어 결과적으로 소수의 핵심적 지식노동자와 다수의 단순노동자로 노동시장을 양극화하였다. 비정규직의 탄생과 급증은 이러한 기술적 바탕을 빼놓고는 성립될 수 없다. 고용수요가 감소되고 고용수요가 있어도 대체가 언제라도 가능한 단순노동이 다수이기에 고용의 질이 악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것이다.

 

소수의 정규직과 다수의 비정규직의 체제는 이러한 배경 하에 탄생하였다. 기술혁신과 더불어 중요한 배경은 경제규모 확대의 한계를 들 수 있다. 과거에 많은 고용을 창출했던 산업들의 확대가 점차 한계에 부딪히게 됨에 따라 한정된 수요를 둘러싼 전 지구적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이는 개별기업들에게 원가 절감의 압박을 보다 강하게 느끼게 만들며 이것이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촉진시켜왔다고 할 것이다.

 

고용수요가 기술혁신과 원가절감 압박으로 축소되는 가운데 노동의 공급은 도리어 전 세계적으로 증가되었고 이것이 신자유주의 실현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노동의 공급이 늘어난 원인은 첫째 여성노동력의 증가를 들 수 있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전업주부’라는 거대한 비 노동인구가 양성평등운동의 성과로 새삼 노동인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점은 많은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노동공급의 증가와 신자유주의 성립기반의 강화를 초래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특별한 기술을 갖지 못한 기혼여성의 무분별한 노동시장 진입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의 큰 문제는 여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음으로 인하여 실제로는 명백히 존재하는 여성 내 계급갈등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해왔던 점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평균수명의 상승으로 길어진 노년의 생계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된 노년노동력의 증가이다. 노년노동력의 증가는 가정 내 노인부양이라는 전통의 붕괴로 인하여 촉진되었다. ‘평생 현역’이라는 기만적 슬로건(대개 이런 것을 내세우는 자들은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성공적인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다수이며 그들에게 노동은 글자 그대로 특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하에 가장 최악의 조건 하에 저임금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신자유주의의 성장을 돕는 최고의 기반이 아닐 수 없다.

 

노동력 공급 증가의 또 하나의 원인은 교육기간의 연장으로 인한 학생노동력의 증가를 들 수 있다. 교육기간의 연장이 노동력의 절대적 증가를 가져 온 것은 아닌데 어차피 과거에도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학생노동력이기에 그들에겐 노동이 유일한 생존의 도구가 아니고 따라서 저임금과의 타협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기반인 저임금노동의 공급원이 되기 쉽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립정신’이나 ‘노동관’이 이를 더욱 촉진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세기 이래 건설되어 온 ‘고비용 복지사회’ 역시 신자유주의 출현의 배경이라고 할 것이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노동자계급은 노동운동을 통하여 노동자의 권익 향상과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획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복지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복지사회는 자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비용을 요하는 부담스러운 사회였지만 세계경제가 확대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그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로 여겨왔다. 하지만 1970년대 석유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확대가 정체됨에 따라 자본은 더 이상 ‘고비용 복지사회’를 존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을 갖고 이를 분쇄하는 움직임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영미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등장의 직접적 계기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3. 보편복지에로의 전환의 필요성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고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보편복지사회의 건설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예를 보면 현재 오바마 대통령이 공공의료제도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복지가 취약한 나라이다. 복지체제 자체가 기업중심으로 되어 있는 이른바 ‘기업복지사회’이기에 복지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효율의 논리 하에서 실시되어 결국 정작 복지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돌아가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또 기업중심의 복지체제는 노동자의 기업에 대한 종속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 미국이 신자유주의의 본거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에는 미국사회에 비해 보편적 복지제도가 많은 편이다. 우선 전 국민의료보험제도가 그렇고 국민연금제도가 또한 그렇다. 대체로 기업중심의 복지체제가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이기에 노동자들의 기업에의 종속 역시 클 수밖에 없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또는 공무원 등이 누리는 복지혜택에 비하여 일반국민들에게 돌아가는 복지혜택은 그다지 크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이 세계최고의 수준이 된 것은 기업중심 복지체제가 신자유주의의물결을 막아낼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보편적 복지 대신 기업중심의 복지체제사회의 경우,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을 강화시켜 신자유주의의 침투가 비교적 용이하다고 할 것이다. 기업 밖에서 받을 수 있는 복지가 적으니 기업에 의존하게 되고 그것이 노동력의 공급을 더욱 확대시키니 기업입장에서는 풍부한 공급을 기반으로 비정규직의 비중을 높여 갈 수 있는 것이다. 기업 밖의 삶과 안의 삶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삶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니 기업의 노동자에 대한 권한은 무소불위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이점 또한 신자유주의적 요소의 도입을 용이하게 한다. 반대로 보편복지가 발달된 유럽사회가 신자유주의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에 의한 사회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은 바로 보편복지사회의 건설이다. 쌍용차사건은 비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안전하다는 대기업 정규직조차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또한 개별기업과 노동자 간의 투쟁의 승부가 이미 정해져 있음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정규직 채용의 축소, 비정규직의 증가, 하청업체에 대한 납품단가 인하압박, 하청업체의 구조조정, 실업자 증가 등의 과정을 통하여 사회 전체에 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에 대한 의존을 떨쳐버리고 사회 전체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보편복지사회의 건설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4. 기본소득의 직접적 효과

 

기본소득이야 말로 뒤떨어진 한국의 보편복지를 한 번에 최고의 수준에 끌어 올릴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아닐 수 없다.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논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뒤떨어진 복지수준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유럽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최고의 수단으로 극복해야 될 구시대적인 복지를 다 경험해야 기본소득이라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과연 이것이 합리적인 생각일까. 최신의 기계가 나왔는데 낡은 방식의 기계를 사용해야 새 기계를 쓸 자격이 생긴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기본소득은 단순한 복지를 떠나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트로이의 목마임을 알아야 한다. 기본소득이 가져올 직접적 효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 해보자

 

기본소득은 성장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기본소득은 유효수요의 유지와 지속적 확대를 통하여 성장을 가져 올 수 있다. 기본소득은 경기에 관계없이 일정 수준의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기침체의 심화를 방지해준다. 안정적인 수입의 보장은 소비를 촉진하여 유효수요의 확대를 가져와 경제성장을 이끈다.

 

기본소득은 자본에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기본소득은 유효수효의 확보라는 점 이외에도 기업의 부담을 덜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보장됨으로 기업은 생활비 보장적 임금체계에서 오는 임금부담을 줄일 수 있고 인력수급에 대하여 보다 유연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이것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지속적 성장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킬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자들에게 덤핑노동 제공을 방지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억지로 받아들여야 할 동기가 약해진 이상 자신들에게 맞는 노동조건을 선택하여 노동력을 판매하고 아니면 노동판매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 생활이 보장되는 한 노동자는 금전적 풍요냐 여유 있는 삶이냐를 선택할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노동을 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에게 든든한 방패막이가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장애인, 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사회적 약자들이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제대로 된 혜택을 받지 못해 사회적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이것이 대물림된 지금까지의 현실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청소년에게는 학업의 길이 노인에게는 안정된 노후가 장애인에겐 자립적인 삶이 열리는 희망찬 미래가 제공될 것이다.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기업 의존적 복지와 임금향상에 의존한 노동운동의 한계를 타파할 힘을 서민대중에게 줄 것이다. 대기업정규직노조가 얻은 노동운동의 성과는 역으로 비정규직과 중소기업노동자 그리고 영세자영업자들의 삶을 옥죄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기업의 업적부진 또는 경기의 전반적 침체는 대기업정규직노조의 구성원마저도 고용불안과 소득저하라는 공포에 몰아넣는다. 기본소득은 기업에 대한 서민대중의 종속을 타파하고 자립적 시민을 양성할 기반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꿈을 실현할 힘을 줄 수 있다.

기본소득은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꿈을 추구하고 실현시킬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부모들은 “그거 해서 밥이나 먹겠니”하며 청소년들의 꿈을 만류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돈이 되지 않지만 사회를 위해 큰 의미를 갖는 꿈에 과감히 도전해도 될 것이며 사람들의 삶은 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기본소득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유일무이한 수단이며 이를 거부할 경우 인류의 미래는 암흑 그 자체이다. 서민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계속적 기술혁신이 노동 수요 감소 노동의 단순화를 가져와 실업의 항상화 고용조건의 악화 등을 피할 방법이 없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기술혁신이 가격저하 이윤저하 유효수요 저하를 가져와 결국 끊임없는 공황이라는 난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기본소득은 서민과 자본이 공존할 길을 열어줄 유일무이한 인류의 선택지인 것이다.

 

 

5. 기본소득 실현의 조건

 

1) 패배주의의 극복

‘비현실적’이라는 논리야 말로 비현실적이다.

 

2) 관성주의 극복

유럽사회의 기계적 답습 극복

 

3) 입신 출세주의의 극복

“부자 되세요”라는 허무맹랑한 구호 하에 개인의 자구 노력에 의존한 성공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4) 지역주의 타파

지역에 얽매인 투표 관행을 극복해야 한다

 

5) 복지죄악론 극복

사회복지는 상호부조의 정신에 의한 것이다.

 

6) 노동신성윤리 극복

노동의 가치는 인정하나 각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

노동의 강요는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6. 맺음말

 

쌍용차투쟁의 패배는 한국의 노조 및 노동운동이 갖는 고립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작년의 지하철 철도노조파업은 국민들의 곱지 않는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을 비판하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일면적인 분석이라고 본다.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지하철 철도파업을 주도하는 노동자들이 한국사회에서는 상당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국민의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쌍용차투쟁 역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제 밥그릇 지키기 이상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는 (적어도 일반국민들에게) 어려울 것이다. 선택된 인간들의 배부른 투쟁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한국사회의 대부분의 성원들의 삶을 압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 역시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하는 배경이다.

 

노동운동의 고립화는 한국사회가 역사적으로 계급사회를 형성한 적이 없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노동자계급이 거대하게 형성되어 노동운동과 정치투쟁을 거듭하며 하나의 계급으로서 뭉쳐져 보편복지국가를 만들어 온 유럽사회와는 달리 한국의 노동자사회는 국가와 기업에 개별적으로 종속되어 왔기에 계급적 이익을 중심으로 뭉치는 계급사회를 경험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이른바 ‘입신 출세주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모든 구성원들은 계급의 이익으로 뭉치는 대신에 각자의 자리에서 수직적 신분상승을 노리며 달려가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내 옆에서 일하는 동료가 계급연대의 파트너가 아니라 나의 입신출세의 적이며 이웃기업의 노동자가 자신이 속한 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라이벌인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침투에 의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는 노동운동의 고립화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조는 사회에서 소수집단으로 고립화되고 제대로 된 노조 하나 갖지 못하는 비정규직들만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규직노조는 연대를 모색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비정규직과 대결마저 불사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너무 일방적인 이야기일까?

 

보편적 복지사회건설 없이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해결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더 이상 개별기업과 개별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어리석은 생각은 갖지 말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투쟁의 방향을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전개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며 그 궁극적인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량주의의 함정에서 하루바삐 깨어나 단숨에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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