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젊은 예술인의 죽음에 부쳐 - 신자유주의 시대, 기본소득이 대안이다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죽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라는 쪽지를 문 앞에 남긴 채.
뒤늦게 알려진 사건에 대해 속죄하는 산자들의 애도의 물결이 일렁인다. 이 속죄는, 이 애도는 그나마 죽은 자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은 시로 위로하고, 누구는 신자유주의를 저주하고, 양심적인 영화인들은 열악한 환경으로 내몬 영화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정부의 책임을 얘기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폭로되는 문화예술인의 비참한 생활과 그로 인한 비극들은 애도하고, 비판하고, 현실을 개탄하던 사이 어느새 잊혀지곤 한다. 누군가는 이런 속죄를, 죽음도 소비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소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창작자를 착취하고 거대자본의 배만 불리는 업계의 구조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난제들이 있다.
신자유주의시대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하는 어떤 이들은, 임금노동으로 살아가려 하지 않은 죽은 예술가를 책망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맞춤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정규직, 파견노동 등 불합리한 일자리만 주어진다. 어떤 능력과 자질을 지녔든, 그런 방식으로만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오랜 상식은 신자유주의 시대하에 더 이상 상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유행 담론인 복지는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복지가 선별적, 잔여적으로 남는 한, 그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우리 사회의 고귀한 활동들, 예술노동, 돌봄노동, 가사노동 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복지’라는 말이 임금노동 아닌 다른 활동들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진영에서 제기하는 실업부조는 신자유주의 사각지대의 누더기조차 될 수 없다. 유행처럼 번지는 '보편복지'라는 대안은 현물이나 서비스 형태로 지급되는 교육ㆍ의료ㆍ주거ㆍ보육ㆍ노후를 분명히 보장하고 기본소득의 도입과 함께 추구될 때만이 신자유주의 시대 임금노동 이탈자들의 삶을 보장할 수 있다.
대안은 있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네트워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죽음이 더이상 이어지지 않기 위한 대안은 기본소득이라고 확신한다. 어떠한 심사나 노동 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 주어지는 소득이, 완전고용시대의 종말에 따른 탈노동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향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대안이다.
2011년 2월 9일
기본소득네트워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