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전략회의 5월 월례토론]
경제위기 대응으로서 기본소득 전략 - 토론문
제갈현숙(사회학, 사회정책)
1. 문제제기
□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손을 대지 않으면서 분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나?
□ 자본주의에서 사회복지는 양면적인 성격을 띤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사회질서를 유지하지위한 자본의 지배 및 통제전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계급의 혁명적 투쟁으로 달성된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반대하는 전략이다. 후자의 성격이 강할수록 탈상품화 지수가 높게 나타나고 후자의 강화는 권력자원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반자본주의적 제도의 형성과 강화를 위해서는 계급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체역량 강화가 핵심에 놓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본소득전략에서 고려하고 있는 운동주체는 누구인가? 또한 반노동의 전선이 어떻게 반자본의 전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모호하다.
2. 담론의 배경과 장점
□ 배경
- 2차 대전 이후 포디즘적 생산관계의 해체 이후 실업은 자본주의의 핵심 사회문제로 자리하게 되었다. 더욱이 탈산업화시대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노동사회의 위기를 더욱 가시화시켜왔다. 우리가 직면한 대량실업은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예외적인 현상이기보다는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문제이자 결과가 되었다. 실업이 이렇게 구조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 생산 영역과 노동시장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먹을 권리'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 그 이전까지 주류 경제학은 물론 맑스주의자들과 노동운동에서도 사람들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오로지 생산영역으로만 국한시켜왔다. 이로 인해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는 맑스주의 틀로부터의 이탈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못해왔다.
- 노동권, 즉 일할 권리, 일자리 지키기, 일자리 나누기와 같은 방식이 처음에는 노동계급의 요구로 시작되어 점차 자본과 국가의 요구로 확산되어 왔다. 자본주의 정당들은 고용과 경제 성장을 상품으로 선거시기마다 판매했으며,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에 적합하도록 법과 사회질서를 변화시켜왔다. 그 결과 노동은 매우 유연해 졌고, 보편주의에 입각했던 소득보장제도는 선별적인 노동연계복지로 전환되었으며 노동과 자본의 권력은 심각한 불균형 상황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로 전파된 이후 거의 모든 부분이 자본의 요구대로 관철되어 진행되어 왔다.
- 끊임없이 반복되는 경제위기마다 일자리는 감소했고 그만큼 불안정한 노동층은 두터워졌다. 산업구조조정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신자유주의 전략은 필요노동시간의 절대적 감소를 달성했다. 이에 더 이상 일자리에 대한 요구보다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상당시간 반실업과 실업상황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한 생존권이 부각되었다.
- 종합적으로 완전고용의 불가능성, 수준 낮은 공공부조와 실업급여의 한계, 강제노동과 자격조건 및 급여심사(means test)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제시되었다.
□ 담론의 장점
-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은 개인의 물질적 조건을 생산 영역의 차원에서 아니라, 재생산의 영역에서 생산영역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 생존권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일자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총 사회의 부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복지 기원을 영국의 구빈법(poor law, 1601)에서 찾는다. 사회복지제도는 출발부터 오늘날까지 노동유무와 노동시장과의 차별성을 둔 급여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급여발생을 위해 노동력의 유무와 노동력이 있을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만 하고, 이들에게 제공되는 급여는 열등처우의 원칙에 입각해 노동시장에서 제공되는 임금보다는 항상 낮게 책정되도록 했다. 오늘날 공공부조제도에서 조건부 수급권과 최저임금 이하의 최저생계비로 설정함으로써 구빈법의 핵심 원리가 유지되고 있다.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키는 전략은 이와 같은 보수적인 사회복지 급여원칙을 파괴할 수 있는 전략적 노선으로 유의미하다.
3. 기본소득전략 운동의 궤적
-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아우토노미아 운동이 노동에서 분리된 소득을 주장했고, 1980년대 독일에서 전개되었던 이른바 Jobber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시도가 이어졌다. Jobber란 사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두 개 이상의 임시직 사업장에 동시에 고용된 사람들을 뜻하고, 이들에게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에 내포된 구조적 강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1980년 대중반 이후 자본의 적극적'유연화'공세가 시작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전략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했던 "모든 이들에게 1500마르크씩을!"이라 구호에서 노동권에서 생존권으로 운동의 전략이 전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일의 유무, 일할 의사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부를 나눠 갖자는 주장은 실현가능성을 떠나,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소득이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처럼 노동과 소득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자유주의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비효율, 재정적자, 관료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회보장제도를 완전히 철폐(독일의 경우 백여 가지 이상)하고, 대신 일정한 소득 한계를 정해 그 이하의 소득자들에게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M. Friedman, Negative income system)하는 방식이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메시지는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단일화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이 대안 전략으로 갖는 논리적 취약성은 매우 명확하다.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적 아이디어와 신자유주의자의 버전 사이의 실질적 차이는 다만 양적 차이만 존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Ernst Rohhoff, 1999)
- 사회적 연대 방식도 사회관계의 시장관계로의 단일화라는 점에서 역시 취약하다. 사회적 연대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정상적인 임노동관계에 놓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재원으로 이들에게 소득을 마련한다는 것을 말한다. 국가로부터 소득을 지원받게 되는 사람들은 생산관계로부터는 배제되었으나 시장관계 내로 단일화될 수 있는 수단을 취할 수 있게 된다. 국가의 관료주의적 개입 없이 스스로 어떤 조건에서도 노동할 준비를 갖출 수 있다.
- 90년대 이후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실업에 대응하기 위한 좌파운동의 새로운 화두였다. 문제는 소득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이런 흐름들이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다시 환원시켜 버리려는 자유주의적 대세에 맞설 수 있는 전략에 달려 있다.
4. 반자본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 전략의 한계와 쟁점
□ 일반적 비판
- 노동윤리감소, 피할 수 없는 복지수준감소, 복지국가 철폐에 따른 분배의 축소, 사회분리, 재정안정성, 실현가능성 등이 일반적인 비판요소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현가능성과 기존 제도와의 비교 관점에서 쟁점을 찾기보다는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한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 연대사회를 위한 국가재정투쟁인가?
- 기본 소득의 재원은 사회보험료와 조세로 형성된다. 이전과 다른 것은 조세원칙의 변화인데 소득세, 법인세, 불로소득 등의 개혁을 통해 국가 일 년 예산과 맞먹는 240조를 확보한다는 내용이다. 즉 국가재정 수입구조의 혁신적 전환과 지출구조의 개혁을 통해 기본소득이 제도화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재정의 이와 같은 변화는 선거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결국 정치투쟁의 장에서 권력의 이전으로 가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바꾸기 위한 이행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인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
- 또한 국가재정을 통한 재분배모델은 연대공동체(Solidargemeinschaft) 사회를 지향하면서 국민들은 연대제공자(Solidaritätgeber)와 연대수혜자(Solidaritätnehmer)로 구분된다. 즉 사회총생산을 재분배하는 데 있어 계급갈등의 문제는 연대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복지국가에서 상시적인 이데올로기로 문제가 되었던 조세납부자와 수혜자 간의 갈등은 다른 형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사회의 총생산을 재분배하는 방법에 있어 직접적으로 자본이 취한 잉여가치분을 피지배계급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 소득세 중심의 형태는 고용되어 노동하는 사람들과 고용되지 못한 사람들 간의 분화를 촉발할 수 있다.
- 안정적인 제도운영을 위해 국가재정 확보는 우선적 과제가 되고, 결국 국가의 경제성장률에 의존적인 모형이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자본의 계속적인 재생산구조의 왜곡된 확장과 집적의 문제에 대해 전면적인 반대가 불가능한 딜레마를 가지게 된다. 또한 생태에 대한 관심이 사상과 입장을 초월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성장론에 대한 기본적 철학이 파악되지 않는다.
□ 기본소득 급여형태와 시장으로의 순응
- 현금급여의 원칙과 욕구(need)가 더 많이 발생되는 사람에게 현금급여뿐만 아니라 현물급여도 유지된다는 원칙이다. 이를 위해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 등이 먼저 달성된 후 기본소득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탈상품화된 형태의 교육, 의료, 주택의 확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기본소득을 위한 선결과제로 제시한다는 것은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더더욱 의문스럽게 하는 절차이다. 각각의 과제가 자본의 이해와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더욱이 교육의 경우,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가 모두 집결되어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 과제들이 이행을 위한 선결과제라고 한다면 이에 따르는 구체적 전략역시도 제시되어야 기본소득의 실현성에 힘이 실릴 수 있다.
- 현금으로 지급되는 사회적 임금이 가지는 가장 큰 맹점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결국 시장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 즉 재화의 생산구조와 서비스의 공급구조는 여전히 시장 메커니즘이 유지된 채 노동자와 시민에게 소득만을 보충할 경우, 포디즘 시기 소비자로 활약했던 노동자들의 소비자로서의 지위가 확대될 것이다. 현재도 사회서비스 이용자들에게 현금급여의 한 형태인 서비스이용권(바우처)이 제공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서비스 적용률은 확대되었고 급여의 수준도 상대적으로 발전했으나 공급구조의 시장 메커니즘으로 인해 다양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즉 소득보장을 위한 현금급여 형태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할 수 있는 기재로까지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득보장의 측면은 항상 생산관계와 공급측면의 반자본주의적 기재와 함께 고려되고 설계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기본소득 전략이 대안담론으로 더욱 내실을 갖기 위해서는 생산영역과 재분배 영역의 분리보다는 통합적 전략에서 반자본 운동으로써의 전망과 탈시장적 요소의 강화, 그리고 주체형성에 대한 전술이 더욱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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