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완 교수 논평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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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항: 한국사회포럼 기본소득네트워크 주최 토론회
1. 논점 중의 하나는 명백한 오독
“기존의 기본복지를 모두 시장화하고 이에 대한 수요만큼을 더 많은 현금 기본소득으로 지급해도, 그러한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 실제로 독일의 자유민주당 및 베르너 등 (신)자유주의자들 중에도 기본소득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보다 평등하고 풍요로운 소비사회를 지향하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각자 원하는 노동 내지 활동을 선택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자유와 이에 기초한 평등한 연대를 지향하는 기본소득’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경우 교육·의료·보육·물·생태자원 및 공기·토지 및 주택·장애인복지·노인돌봄을 포함한 기타의 사회서비스 등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와 수요를 충족시키는 차원은 탈상품화하여 전면적인 무상의 공유재로 전환시키는 것과 개인별 수요충족을 위해 현금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결합하게 될 것이다. 물론 금민 발표자는 이러한 기본소득에 대해 논평자와 공감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부분이 금민 발표자의 글에서는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 (곽노완 교수 논평)
윗 부분은 제 글에 대한 오독이라고 보입니다. 글에서 저는 “의료, 주거, 교육, 보육, 노후에 있어서의 기본복지”의 전제 위에서 기본소득 도입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 모두에게 의료, 주거, 교육, 보육, 노후에 있어서의 기본복지를 보장해야 하며 국민이라면 단지 '국민'이라는 보편적인 자격에 입각하여 누구나 그와 같은 복지를 권리로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서 국민이라면 '국민'이라는 보편적인 자격에 입각하여 누구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기본복지의 보장이 신자유주의 이전의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라면 기본소득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이후 변화된 세계에서의 사회경제적 국민주권의 실현 방식일 것이다. 국민 모두의 보편적 복지의 두 축인 기본복지의 보장과 기본소득을 떠나서 민주주의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하다.”(금민 발제문)
2. ‘규제적 이념’로서의 ‘지구 전체에 대한 사회적 공유’(gesellschaftlicher Gemeinbesitz als regulative Idee)?
곽노완 교수의 논점 중의 다른 하나는 급진적 기본소득의 도입과 연기금·금융자본 등 사회적 축적기금의 전사회적 공유로의 전환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속성 테제는 1) 투기불로소득 중과세로부터 연기금 금융회사의 사회적 공유로의 전환에 관한 사회경제적 경로를 설정하는 방식에 의하여 확보될 뿐만 아니라, 2) 두 가지 모두 ‘지구 전체에 대한 사회적 공유의식의 확장’과정으로 파악됨에 의하여 확보되는 듯하다. 1)은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전환과정이 순조로운 자연사적 과정이 아니라 정치투쟁의 과정을 의미할 것이기에 연속성 테제를 지지해 주는 가설이기 힘들고, 2)는 급진적 기본소득 도입과 전면적인 사회적 공유라는 두 단계 모두에 대해 효력을 가지는 ‘지구 전체에 대한 사회적 공유의식’을 오늘 날의 대다수가 과연 적어도 그와 같은 ‘규제적 이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의심스럽다. 오히려 현 시대에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규제적인 이념은 ‘지구 전체에 대한 사회적 공유’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민주권’ 등과 같은 매우 상식적인 이념들이 아닐까?
토론회 당일에 갑자기 ‘지구 전체에 대한 사회적 공유의식’이 마치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과 같은 규제적 이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에 대해 짧게 언급했고, 칸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출간했다가 탄압을 받고 침묵하고 있을 때 친구들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끝맺었다. 스스로 ‘트로이의 목마’라고 주장하는 ‘목마’는 트로이에 입성하지 못하고 ‘헬라스의 목마’로 끝날 수도 있다.
3. 어떤 기본소득인가?
이 점은 곽노완 교수의 지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자, 지대, 배당과 같은 투기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환경세의 도입 등 재원조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 발표문의 완결성을 떨어뜨린다. 비록 기본소득 네트워크의 다른 연구물들에 의하여 밝혀진 것이라 해도 초소한 간략하게라도 언급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소비세로 재원 형성을 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어떤 기본소득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1) 재원이 무엇이냐, 2) 충분한 기본소득인가 아니면 초소한의 기본소득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곽노완 교수의 지적대로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인가’의 여부는 ‘어떤 기본소득인가’라는 차원과 겹쳐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차원은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동일한 시공간에서 동시적·공시적인 사회운동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동의해야 할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1) 투기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환경세의 도입에 의해 조성된 충분한 기본소득의 도입과 2) 연기금 및 금융회사에 대한 사회적 공유로의 전환이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동일한 시공간에서 동시적·공시적인 사회운동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으로 사고하지는 않는다. 그 두 가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연관은 매우 복잡한 과정이 놓여 있을 것이며 단선적이지 않을 것이며,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규제적 이념’으로 작동한다고 전제된 ‘지구 전체에 대한 사회적 공유’의 -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 실효성에 대해 필자는 회의하기 때문이다. 규제적 이념? 설사 그런 차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구 전체에 대한 사회적 공유’와 같은 피안의 어떤 것이 아니라 현실성의 범주일 것이며, 현실성/효력과 이성/논리의 통일로서 민주주의나 자유, 주권 등의 개념이 그러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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