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에 올리려고 했는데 늦어버렸네요. 자료집이 이미 따로 파일로 올라왔네요.
그날 발표한 것에서 약간 고치고 마지막에 구두로 한 이야기도 추가해서 썼습니다.
이수봉발표논평.hwp
이수봉의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논평
정성훈(아카데미아 코뮤닉스 회원, 서울대 강사)
이수봉님의 글은 현대 경제의 변화 양상 및 그에 따른 노동의 처지 변화, 그리고 계급 구도의 재편 양상을 잘 진단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진단에는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이 상당히 불편하게 느낄만한 내용들도 가감 없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발표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발표자는 첫째, 전통적인 산업노동이 아닌 노동, 정확한 고용 형식을 띄지 않으며 생산적인지 아닌지가 미리 결정될 수 없는 노동 - 발표자의 표현에 의하면 ‘비물질노동’ 혹은 ‘그림자노동’ - 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잘 진단하고 있습니다(30쪽).
둘째, 정규직 임금노동자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자산이라는 점을 직시하며(32쪽), 그들 안에서의 대중성과 현실성을 강조하는 요구가 더 이상 진보적이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35쪽), 현대 사회의 계급화 양상이 1/49/50, 즉 저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자면 P/I/E, 즉 ‘특권(privilege)/포함(inclusion)/배제(exclusion)’로 재편되는 양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37쪽). 이것은 세 번째 배제된 자들의 층이 ‘실업’이나 ‘산업예비군’, ‘룸펜’ 등이라 불리는 임시적인 상태나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매우 정상적이며 사회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광범위한 ‘잉여’, ‘쓰레기'임을 주목한 바우만의 진단(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까지 포괄되는 포함의 영역과 인격 자체로조차 취급받지 못하는 배제의 영역이 양극화되며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경계선상에 있다는 루만의 진단(Niklas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618쪽 이하) 등 최근의 사회학적 진단들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셋째, 그럼에도 P와 I가 E에게 강요해온 ‘노동윤리’를 거부하고(38쪽), P가 E를 이용해 I를 압박하는 ‘정규직양보론’을 비판함으로써(33쪽 등), 갈등의 양상을 49와 50 사이의 것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50에게 가장 절실한 권리(기본소득)의 도입이 49의 해방(노동 안에서의 해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역설합니다.
논평자는 이 세 지점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이런 관점이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혁신에 크게 기여하리라 기대합니다. 그럼에도 셋째에 담겨있는 처방의 설득력 문제를 비롯 이 글에 대해 세 가지 문제제기를 하고자 합니다.
1) 발표자는 총고용보장을 위해서라도 기본소득 도입이라는 압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기본소득론자들 중에는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더욱 촉진하려는 경향도 있으며, 이는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 정규직이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를 충분히 성립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이 있으니까 좀 더 해고가 쉬워져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입니다. 발표자는 이 문제와 정면 대결하지 않고 기본소득이 정규직과 배제된 자들 모두에게 좋은 정책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낙관합니다. 기본소득이 안정된 고용과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현실적인 도입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때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2) 발표자는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면서 곳곳에서 경제 위기에 대한 케인즈주의적 처방책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39쪽) 물론 노동사회를 전제로 하는 본래의 케인즈주의는 기본소득론과 대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케인즈주의의 핵심 테제는 ‘유효 수요 창출’이고, 이를 위한 ‘완전 고용’이나 ‘기간산업 중심의 사회적 투자’는 부차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기본소득론은 유효 수요 창출이라는 점에서는 케인즈주의자들도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회적 투자의 관점을 인지재 또는 정보재 생산이라는 방향으로 옮긴다면, 4대강 삽질 사업이 아니라 기본소득을 통해 간접 고용 효과 및 정보산업 발전 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론은 강한 의미의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폭넓은 이념적 입장에서도 지지할 수 있는 구상이며, 케인즈주의자들도 충분히 포섭할 수 있는 구상입니다. 괜히 적(敵)의 숫자를 늘릴 필요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케인즈주의는 30년대 세계대공황 이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책이기에 그만큼 이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오늘날 새로운 대공황의 조짐에 대응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들을 낳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도들을 탈산업, 탈노동의 패러다임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수 있습니다.
3) 발표자가 “비물질 노동의 가능성과 결합한 ‘노동 안에서의 해방’과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지속적인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길”을 말할 때, 이 두 가지 길은 발표자가 ‘비물질노동’을 ‘그림자노동’과 동일시한다고 할 때는 같은 길로 보입니다. 즉 자본에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회적 노동에서 가능한 해방이란 ‘노동 안에서의 해방’이자 동시에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노동 안에서의 해방’은 인지자본주의 혹은 비물질노동 우위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큰 규모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산업노동이 노동에 대한 더 높은 자기 통제력을 갖게 되고 덜 착취받게 되는 일로 간주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해방’이라는 단어에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노동이 어쨌거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만은 없는 ‘힘든 일’을 뜻한다 할 때, 저는 노동 안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은 가능해도 노동 안에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이 현대 사회와 관련해 갖는 중요한 의의 하나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현대 사회를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이며, 각 기능체계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포함 혹은 인권의 원리를 현대성(modernity)으로 파악한 루만은 이를 “누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누가 무엇에 기여해야 하는지를 미리 말할 수 없다”(Das Recht der Gesellschaft: 116쪽)고 표현합니다. 과거에 전혀 기여한 바 없고, 앞으로도 기여할 것인지 참으로 의문스러운 사람들이 가끔 엄청난 일을 해냄으로써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해왔습니다. 대학은 안 다니고 고물 버스를 연구실로 삼아 Yahoo라는 검색 엔진을 만든 사람들, 경제학 근처도 안 가본 전문대 출신이지만 한국 경제를 뒤흔든 미네르바 등등. 기성 사회주의는 오히려 이런 면에서 협소한 미래 개방성으로 인해 붕괴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더 이상 제2의 미네르바, 제2의 김기덕, 제2의 서태지 등이 나올 수 없는 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 듯합니다. 일용직 노동이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었고 좋은 친구들로부터 얻어먹고라도 살 수 있었던 조건 자체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이야말로 사회의 미래 개방성을 보장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제도라고 봅니다.
최근 대중음악계에서 큰일을 친 백수 한 명이 만든 노래 가사를 빌어 기본소득의 의의를 정식화하면서 논평을 마칠까 합니다.
별 ‘일’ 없이 사는 사람들 중 누가 앞으로 ‘별일’을 해낼지 모르므로 ‘별일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도가 ‘기본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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