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하지만 매력적이진 않아
[질라라비] 기본소득, 섣부른 제도설계에 대한 우려
제갈현숙 (한신대 외래교수) / 2010년02월24일 17시16분
기본소득의 단순함이 왜 파괴력을 가지지 못하나?
새로운 사상이나 이론들 중에서 체제의 문제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정합성을 갖거나, 새로운 제도적인 해법을 제시하였을 때, 대안담론으로써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반자본주의’라는 좌파의 거대담론은 현재성과 구체성이라는 요소에서 비판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파괴력과 자본의 공세에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 한 듯 보이기도 한다.
여러 가지 ‘대안사회담론’은 전 지구적으로 고민되어져 끊임없이 제출되어져 왔다. ‘기본소득(basic income; Grundeinkommen)’은 이러한 지구적 시도 중의 하나이지만, 대안담론으로써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은 우파로부터 좌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기 때문에 새로운 담론으로써 그 지위와 성격은 여전히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기본소득 담론은 아직까지는 체제 문제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가 갖추어야 할 정합성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재정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한 소득재분배 모델을 제시하였고, 기본소득 제도의 단순한(simple) 요소에 대한 우수성을 부각시켜 왔다.
그러나 제도 설계 초기 균등 현금급여 중심의 설계에서 현물급여까지 포함하는 모델로 확장되면서 기본소득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현금급여 중심의 고유모델이 가지는 독자성은 모호해 졌다. 또한 재원형성과 기본소득을 위한 전제조건인 무상의료 및 무상교육을 위한 경제 및 정치적 방법론은 단서수준이거나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이 가지는 단순성 때문에 국민 상당수로부터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고, 국민의 동의가 전제된다면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상당수의 시민과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의를 구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가 빠져 있기 때문에 이 담론은 파괴적이지도 강력하지도 않다(not powerful).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그룹은 실현가능한 모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제도설계에 공을 들였지만 오히려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담론의 지형을 제한하고 있다. 섣부른 제도설계보다는 담론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인 우수성이 먼저 입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이 글은 기본소득에 대한 제도적인 측면보다는 대항 담론으로써 가지는 유효한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노동과 연계되지 않는 사회적 급여의 실현이 가지는 사회복지의 정치․경제학적 측면의 강화에 주목한다.
사회복지에서 노동의 중심성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과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을 구분해서 사회복지를 발전시켜왔다.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19세기 말부터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발전되어왔다. 반면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대표적인 집단인 빈민과 실업자에 대해서는 17세기 구빈법(old poor law)과 18세기 스핀햄랜드(speenhamland system)와 같은 구빈제도에서 현재의 공공부조로 발전되었다. 이처럼 사회정책은 ‘노동’을 매개로 제도의 대상과 급여의 내용을 구분하여 발전해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어떤 조건을 전제로 사회적 급여(social benefit)를 줄 것인가’는 사회복지 역사상 아마도 가장 오래된 질문이자 기준이었다. 노동시장으로부터 소득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보편적 원리에 기반을 둔 소득보장 제도가 운영된다. 반면 노동시장 외부에 있는 대상자에게는 선별적 원리에 입각해서 급여를 위한 노동의무를 부과한다. 실업자의 경우 취업을 위한 노력을 증명해야만 하고, 빈곤층의 경우 노동능력의 유무로 구분을 두어 노동능력이 있는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만 사회적 급여를 받을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급여의 수준은 일반 노동시장에서 형성된 최저임금보다 항상 낮아야 한다는 열등처우의 원칙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이제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를 해결하든가, 노동력을 팔 수 없는 경우에는 노동능력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급여를 제공받아 왔다. 그러므로 이미 자본계급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노동의 중심성을 흩트려 놓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요청된다.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배제되기 시작한 노동
소득보장 중심의 고전적 복지국가들은 포스트 포디즘시기, 신자유주의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탈산업사회로의 전환, 자본의 지구화, 냉전체제 해체와 같은 변화는 산업입지경쟁을 극대화시켜 민족국가단위의 사회정책과 사회적 합의구조를 매우 위축시켰다.
포디즘 시기에 준수되었던 사회적 합의나 노동조합과의 합의는 자본에게 불필요한 요건이 되었고, 자본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자본과 생산입지를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었다. 민족국가들은 자본을 더 많이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사회복지 및 노동비용을 축소시키는 친자본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다양한 복지국가체제(welfare state regimes)에서 공통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지(welfare)에서 노동연계복지(workfare)로 수렴,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장의 확대, 국가의 역할이 시민에 대한 소득보장보다는 시민 개인의 책임 및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실업문제가 현재의 산업구조에서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과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bad job)의 확대,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형태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 등이다. 즉 탈산업화시대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노동사회의 위기는 더욱 가시화되었고, 우리가 직면한 실업문제는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경제공황의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의 총이윤율 증대를 위한 필수적이고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실업이 이렇게 구조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 생산 영역과 노동시장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먹을 권리'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 이전까지 주류 경제학은 물론 맑스주의자들과 노동운동에서도 사람들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오로지 생산영역으로만 국한시켜왔다. 이로 인해 '소득을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는 맑스주의 틀로부터의 이탈을, 현실적으로는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못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후 복지권이 시민권의 일부인 사회권(social rights)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에 도래하였다. 임금을 통한 소득보장이 불안정한 상당수의 시민들에 대한 복지권이 어떻게 유지되고 확대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된 다양한 대안적인 복지 담론 중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본소득의 참신성과 우려성
기본소득이란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이면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을 말한다. 즉 급여자격을 위한 조건이 되었던 자산조사(means tested), 노동능력여부, 기여여부와 관련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국가가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시민에게 똑같은 수준의 급여를 동등하게 지급하고, 이때 소득 수준이나 성별은 고려하지 않지만 연령에 따른 급여차이는 존재한다. 또한 가족 단위 지급이 아니라 개인별로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하게 된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게 된 배경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자유주적 사회정책이 심화된 빈곤과 양극화의 문제를 양산할 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또한 실업 및 비정규직 증가 등으로 변화된 노동시장, 기술적 진보와 생산성 향상으로 증대된 부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분배,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어렵지만 생산성은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입장에서 전 시민에 대한 기본소득이 관점이 제출되었다.
기본소득은 기존 소득보장제도의 병폐였던 노동과의 연계성을 모두 끊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참신하다. 요즘 광고에서 나오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받을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의 참신성은 마냥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은 생산영역과 생산관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체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본의 총이윤을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에게까지 제공하게 되었을 때 시혜와 자선이 아닌 권리적 의미의 사회정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총 소득의 증가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기본소득이 가지는 대표적인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첫째, 이제까지 부의 재분배는 사회복지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적 필요(social need)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제공되어왔다.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연계복지가 강화되면서 자산조사 및 조건부 수급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권의 축소와 저소득층 및 취업취약계층에 대한 급여제한에 기인한 소득감소가 이어졌다. 이에 공공부조(빈곤층 및 실업자)에 대한 조건 없는 사회적 급여가 제안되기도 하였지만, 기본소득에서는 특정 계층이 아닌 전 국민에게 동일한 수준의 월급여를 제안함으로써 ‘제한적인 수량적 평등(numerical equality)’이 아니라 ‘전면적인 수량적 평등’을 주장한다. 즉 모두를 동일한 위험과 동일한 수준으로 간주해서 동일한 급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로 심화된 양극화와 같은 사회문제와 소득의 불균형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2008년 12월 기준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약153만3명(85만54천가구)으로 전인구대비 수급률은 단 3.1%이다. 이들 중 약 78%가 비경제활동인구이고, 1인 가구가 약 62%로 가장 높다
(이들 가구의 소득 규모에 대한 조사 결과 <0원 초과-20만원 이하>인 가구가 50.2%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20만원 초과-40만원 이하>의 가구가 18.3%, <40만원 초과-60만원이 하>의 가구가 9.5%였고 소득이 전혀 없는 가구는 12.6%에 달한다).
이들에게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현재 보다 소득이 향상될 수 있지만 수급권자 78%가 비경제활동이구이고, 62%가 1인 가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상향된 급여수준으로도 생계보장이 어렵다. 그러나 중간계급 이상에게 제공될 기본소득은 해당 가구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선택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빈곤층에 대한 소득 보장은 중산층 이상에게 균일한 액수의 사회적 급여를 제공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더욱이 고용보험 사각지대 규모는 국회예산처 추계 약 1,336만 명으로 경제활동인구의 약 57%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이들에 대해 실업으로 단절된 소득을 보완해줄 기재가 현재로써는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절대적 빈곤층으로부터 불안정 노동층까지, 절대적 소득의 상실로부터 소득의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상당하다. 사회적 필요의 결핍과 생애위험이 높은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 왜 동일하게 사회적 급여가 제공되어야 하는가? 실업자와 빈민층이 중간계급 이상과 동일한 기본소득을 획득하는 것이 과연 복지제도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에 기본소득은 적절한 답변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시장 임금 이외에 제공되는 사회임금의 수준이 GDP의 31%, 국가재정의 규모가 약 56%일 경우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의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신설될 조세로 인해 상승할 지대, 임대료, 금융수수료 등이 다시 실물경제와 서민 경제에 미칠 요소가 모두 차단되어져 있다.
유산자와 자본은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사회적 비용에 대해 절대 그들의 총이윤에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제가 개혁되더라도 결국 그들이 부담하는 비용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이에 대한 안전장치가 제시되지 않았고, 임금소득을 보조하는 성격의 기본소득이 역으로 임금시장과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려되어 있지 않다.
1795년부터 영국에서 시행되었던 스핀햄랜드제도(Speenhamland system)에서 일용노동자의 최소임금을 설정하여 교구가 노동자의 부족한 소득을 보조해주었다. 식량가격과 부양가족의 숫자를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노동자의 소득 보조 금액을 정하였다. 즉 최저임금을 정하지 않고 저소득층의 임금을 보조해주는 방식으로 가족이 많을수록 유리하였다.
그러나 제도의 목적과는 다르게 고용주들에 의해 악용되어 의도적으로 낮은 임금이 지급되었고 그 결과 저임금이 형성되고 임금이 적다고 불평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기도 하였다. 즉 사회임금은 한편으로는 가계소득을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임금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점이 기본소득에서는 고려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안티테제로써 기본소득의 이데올로기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으로서의 가치를 담지하고 있다. 요는 소득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이런 흐름들이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다시 환원시켜 버리려는 자유주의적 대세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일자리 대신에 생존권의 명목으로 현금으로 받는 사회적 급여만으로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하는 사회복지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21세기 노동권은 생산과정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당수의 산업예비군, 불안정 노동층 그리고 이로 인해 증가해 온 노동빈곤층의 생존권이 자본의 총이윤을 위해 언제라도 위협당하고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갖가지 스펙을 쌓아도 취업이 어려운 청년들로부터 구조조정과 유연화로 인한 해고에 이르기까지 이제 노동력자체가 자본과의 관계에서 쉬 교환되지도 않고 있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전략은 노동력의 절대량을 축소시키거나 사회적 덤핑을 통해 노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자본은 더 많은 선택을 노동의 착취를 통해 달성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대부분은 스스로 노동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노동계급 대다수의 생존은 여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상위계층을 제외하고는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탈노동 패러다임을 외치며 최소 소득 보장과 노동의 선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신노동에 대한 개념과 탈노동 패러다임은 발전해야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래 생산관계에 더욱 종속적인 노동계급에 대한 조건과는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생산관계에 주목해야만 한다. 또한 생산과정 내부의 노동자와 이로부터 배제된 노동자들 모두를 노동계급의 관점으로 포괄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만이 담세자와 수혜자라는 계급 내 대립구도가 지양될 수 있다. 현재의 노동여부나 노동력 유무와 관계없이 사회적 급여가 제공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드러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동일한 권리부여의 이데올로기의 형성에서 출발할 수 있다.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현재의 체제 유지를 위해 철저하게 유린되어 왔던 노동계층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복원이야 말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에 반하는 사회복지로써의 위상을 가질 것이며 파워풀한 담론으로써 인구에 회자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나 이론들 중에서 체제의 문제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정합성을 갖거나, 새로운 제도적인 해법을 제시하였을 때, 대안담론으로써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반자본주의’라는 좌파의 거대담론은 현재성과 구체성이라는 요소에서 비판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파괴력과 자본의 공세에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 한 듯 보이기도 한다.
여러 가지 ‘대안사회담론’은 전 지구적으로 고민되어져 끊임없이 제출되어져 왔다. ‘기본소득(basic income; Grundeinkommen)’은 이러한 지구적 시도 중의 하나이지만, 대안담론으로써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은 우파로부터 좌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기 때문에 새로운 담론으로써 그 지위와 성격은 여전히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기본소득 담론은 아직까지는 체제 문제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가 갖추어야 할 정합성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재정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한 소득재분배 모델을 제시하였고, 기본소득 제도의 단순한(simple) 요소에 대한 우수성을 부각시켜 왔다.
그러나 제도 설계 초기 균등 현금급여 중심의 설계에서 현물급여까지 포함하는 모델로 확장되면서 기본소득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현금급여 중심의 고유모델이 가지는 독자성은 모호해 졌다. 또한 재원형성과 기본소득을 위한 전제조건인 무상의료 및 무상교육을 위한 경제 및 정치적 방법론은 단서수준이거나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이 가지는 단순성 때문에 국민 상당수로부터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고, 국민의 동의가 전제된다면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상당수의 시민과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의를 구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가 빠져 있기 때문에 이 담론은 파괴적이지도 강력하지도 않다(not powerful).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그룹은 실현가능한 모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제도설계에 공을 들였지만 오히려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담론의 지형을 제한하고 있다. 섣부른 제도설계보다는 담론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인 우수성이 먼저 입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이 글은 기본소득에 대한 제도적인 측면보다는 대항 담론으로써 가지는 유효한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노동과 연계되지 않는 사회적 급여의 실현이 가지는 사회복지의 정치․경제학적 측면의 강화에 주목한다.
사회복지에서 노동의 중심성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과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을 구분해서 사회복지를 발전시켜왔다. 노동세계 내부의 대상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19세기 말부터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발전되어왔다. 반면 노동세계로부터 배제된 대표적인 집단인 빈민과 실업자에 대해서는 17세기 구빈법(old poor law)과 18세기 스핀햄랜드(speenhamland system)와 같은 구빈제도에서 현재의 공공부조로 발전되었다. 이처럼 사회정책은 ‘노동’을 매개로 제도의 대상과 급여의 내용을 구분하여 발전해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어떤 조건을 전제로 사회적 급여(social benefit)를 줄 것인가’는 사회복지 역사상 아마도 가장 오래된 질문이자 기준이었다. 노동시장으로부터 소득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보편적 원리에 기반을 둔 소득보장 제도가 운영된다. 반면 노동시장 외부에 있는 대상자에게는 선별적 원리에 입각해서 급여를 위한 노동의무를 부과한다. 실업자의 경우 취업을 위한 노력을 증명해야만 하고, 빈곤층의 경우 노동능력의 유무로 구분을 두어 노동능력이 있는 경우 반드시 일을 해야만 사회적 급여를 받을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급여의 수준은 일반 노동시장에서 형성된 최저임금보다 항상 낮아야 한다는 열등처우의 원칙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이제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를 해결하든가, 노동력을 팔 수 없는 경우에는 노동능력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급여를 제공받아 왔다. 그러므로 이미 자본계급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노동의 중심성을 흩트려 놓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요청된다.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배제되기 시작한 노동
소득보장 중심의 고전적 복지국가들은 포스트 포디즘시기, 신자유주의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탈산업사회로의 전환, 자본의 지구화, 냉전체제 해체와 같은 변화는 산업입지경쟁을 극대화시켜 민족국가단위의 사회정책과 사회적 합의구조를 매우 위축시켰다.
포디즘 시기에 준수되었던 사회적 합의나 노동조합과의 합의는 자본에게 불필요한 요건이 되었고, 자본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자본과 생산입지를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었다. 민족국가들은 자본을 더 많이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사회복지 및 노동비용을 축소시키는 친자본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다양한 복지국가체제(welfare state regimes)에서 공통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지(welfare)에서 노동연계복지(workfare)로 수렴,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장의 확대, 국가의 역할이 시민에 대한 소득보장보다는 시민 개인의 책임 및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실업문제가 현재의 산업구조에서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과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bad job)의 확대,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형태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 등이다. 즉 탈산업화시대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노동사회의 위기는 더욱 가시화되었고, 우리가 직면한 실업문제는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경제공황의 결과라기보다는 자본의 총이윤율 증대를 위한 필수적이고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실업이 이렇게 구조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측면에서 생산 영역과 노동시장에서 이탈된 사람들에 대한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먹을 권리'는 1980년대 이후 유럽 좌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 이전까지 주류 경제학은 물론 맑스주의자들과 노동운동에서도 사람들이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오로지 생산영역으로만 국한시켜왔다. 이로 인해 '소득을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는 맑스주의 틀로부터의 이탈을, 현실적으로는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려되지 못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후 복지권이 시민권의 일부인 사회권(social rights)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에 도래하였다. 임금을 통한 소득보장이 불안정한 상당수의 시민들에 대한 복지권이 어떻게 유지되고 확대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된 다양한 대안적인 복지 담론 중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본소득의 참신성과 우려성
기본소득이란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이면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을 말한다. 즉 급여자격을 위한 조건이 되었던 자산조사(means tested), 노동능력여부, 기여여부와 관련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국가가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시민에게 똑같은 수준의 급여를 동등하게 지급하고, 이때 소득 수준이나 성별은 고려하지 않지만 연령에 따른 급여차이는 존재한다. 또한 가족 단위 지급이 아니라 개인별로 매달 일정 금액이 지급하게 된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게 된 배경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자유주적 사회정책이 심화된 빈곤과 양극화의 문제를 양산할 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또한 실업 및 비정규직 증가 등으로 변화된 노동시장, 기술적 진보와 생산성 향상으로 증대된 부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분배,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어렵지만 생산성은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입장에서 전 시민에 대한 기본소득이 관점이 제출되었다.
기본소득은 기존 소득보장제도의 병폐였던 노동과의 연계성을 모두 끊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참신하다. 요즘 광고에서 나오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받을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의 참신성은 마냥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은 생산영역과 생산관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체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본의 총이윤을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에게까지 제공하게 되었을 때 시혜와 자선이 아닌 권리적 의미의 사회정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총 소득의 증가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기본소득이 가지는 대표적인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첫째, 이제까지 부의 재분배는 사회복지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적 필요(social need)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제공되어왔다.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연계복지가 강화되면서 자산조사 및 조건부 수급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권의 축소와 저소득층 및 취업취약계층에 대한 급여제한에 기인한 소득감소가 이어졌다. 이에 공공부조(빈곤층 및 실업자)에 대한 조건 없는 사회적 급여가 제안되기도 하였지만, 기본소득에서는 특정 계층이 아닌 전 국민에게 동일한 수준의 월급여를 제안함으로써 ‘제한적인 수량적 평등(numerical equality)’이 아니라 ‘전면적인 수량적 평등’을 주장한다. 즉 모두를 동일한 위험과 동일한 수준으로 간주해서 동일한 급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로 심화된 양극화와 같은 사회문제와 소득의 불균형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2008년 12월 기준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약153만3명(85만54천가구)으로 전인구대비 수급률은 단 3.1%이다. 이들 중 약 78%가 비경제활동인구이고, 1인 가구가 약 62%로 가장 높다
(이들 가구의 소득 규모에 대한 조사 결과 <0원 초과-20만원 이하>인 가구가 50.2%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20만원 초과-40만원 이하>의 가구가 18.3%, <40만원 초과-60만원이 하>의 가구가 9.5%였고 소득이 전혀 없는 가구는 12.6%에 달한다).
이들에게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현재 보다 소득이 향상될 수 있지만 수급권자 78%가 비경제활동이구이고, 62%가 1인 가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상향된 급여수준으로도 생계보장이 어렵다. 그러나 중간계급 이상에게 제공될 기본소득은 해당 가구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선택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빈곤층에 대한 소득 보장은 중산층 이상에게 균일한 액수의 사회적 급여를 제공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더욱이 고용보험 사각지대 규모는 국회예산처 추계 약 1,336만 명으로 경제활동인구의 약 57%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이들에 대해 실업으로 단절된 소득을 보완해줄 기재가 현재로써는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절대적 빈곤층으로부터 불안정 노동층까지, 절대적 소득의 상실로부터 소득의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상당하다. 사회적 필요의 결핍과 생애위험이 높은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 왜 동일하게 사회적 급여가 제공되어야 하는가? 실업자와 빈민층이 중간계급 이상과 동일한 기본소득을 획득하는 것이 과연 복지제도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에 기본소득은 적절한 답변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시장 임금 이외에 제공되는 사회임금의 수준이 GDP의 31%, 국가재정의 규모가 약 56%일 경우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의 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신설될 조세로 인해 상승할 지대, 임대료, 금융수수료 등이 다시 실물경제와 서민 경제에 미칠 요소가 모두 차단되어져 있다.
유산자와 자본은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사회적 비용에 대해 절대 그들의 총이윤에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제가 개혁되더라도 결국 그들이 부담하는 비용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이에 대한 안전장치가 제시되지 않았고, 임금소득을 보조하는 성격의 기본소득이 역으로 임금시장과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려되어 있지 않다.
1795년부터 영국에서 시행되었던 스핀햄랜드제도(Speenhamland system)에서 일용노동자의 최소임금을 설정하여 교구가 노동자의 부족한 소득을 보조해주었다. 식량가격과 부양가족의 숫자를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노동자의 소득 보조 금액을 정하였다. 즉 최저임금을 정하지 않고 저소득층의 임금을 보조해주는 방식으로 가족이 많을수록 유리하였다.
그러나 제도의 목적과는 다르게 고용주들에 의해 악용되어 의도적으로 낮은 임금이 지급되었고 그 결과 저임금이 형성되고 임금이 적다고 불평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기도 하였다. 즉 사회임금은 한편으로는 가계소득을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임금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점이 기본소득에서는 고려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안티테제로써 기본소득의 이데올로기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이라는 명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으로서의 가치를 담지하고 있다. 요는 소득을 노동으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이런 흐름들이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다시 환원시켜 버리려는 자유주의적 대세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일자리 대신에 생존권의 명목으로 현금으로 받는 사회적 급여만으로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하는 사회복지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21세기 노동권은 생산과정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부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당수의 산업예비군, 불안정 노동층 그리고 이로 인해 증가해 온 노동빈곤층의 생존권이 자본의 총이윤을 위해 언제라도 위협당하고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갖가지 스펙을 쌓아도 취업이 어려운 청년들로부터 구조조정과 유연화로 인한 해고에 이르기까지 이제 노동력자체가 자본과의 관계에서 쉬 교환되지도 않고 있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전략은 노동력의 절대량을 축소시키거나 사회적 덤핑을 통해 노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자본은 더 많은 선택을 노동의 착취를 통해 달성하고 있지만 노동계급의 대부분은 스스로 노동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노동계급 대다수의 생존은 여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상위계층을 제외하고는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탈노동 패러다임을 외치며 최소 소득 보장과 노동의 선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신노동에 대한 개념과 탈노동 패러다임은 발전해야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래 생산관계에 더욱 종속적인 노동계급에 대한 조건과는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생산관계에 주목해야만 한다. 또한 생산과정 내부의 노동자와 이로부터 배제된 노동자들 모두를 노동계급의 관점으로 포괄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만이 담세자와 수혜자라는 계급 내 대립구도가 지양될 수 있다. 현재의 노동여부나 노동력 유무와 관계없이 사회적 급여가 제공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드러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동일한 권리부여의 이데올로기의 형성에서 출발할 수 있다.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현재의 체제 유지를 위해 철저하게 유린되어 왔던 노동계층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복원이야 말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에 반하는 사회복지로써의 위상을 가질 것이며 파워풀한 담론으로써 인구에 회자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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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신자유주의 / 최저임금 / 기본소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