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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발표한 글 올립니다. 이날 발표이후 뒷풀이에서 민주노동자연대(전원배), 전국사무연대노조(김호정 위원장), 전국여성노조연맹(이찬배 위원장)으로부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공동주최에 참여하겠다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
곽노완(서울시립대 교수)
1. 문제제기: 노동운동의 위기
197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0년대 이래 레이건과 대처를 필두로 하여 최근까지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정부가 창궐하면서 미국을 비롯하여 주요 선진국에서 실업자가 폭증하며 비정규직이 대량으로 양산되고 노조조직률이 급속히 떨어졌다. 이와 더불어 정규직노동자는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 정규직노동자가 중심이 된 노조운동 및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유지를 위한 자본가계급의 동맹군이며, 심지어 반동적이라는 비난마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민주노조 운동이 1987년 이래 새롭게 힘차게 부상한 한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심지어 한국의 민주노총은 1996-7년 총파업을 통해, 다양한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다수 사회성원들로부터 열렬한 갈채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97-98년 외환위기 이후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상황은 돌변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노동운동을 비난하며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하는 다양한 진보세력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과거에 노동운동이 자신들을 핍박했다는 상상적 또는 현실적인 피해의식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다양한 진보세력은 생태운동, 여성운동, 실업자운동, 소수자운동, 빈민운동, 인권운동, 학생운동, 청소녀(년)운동, 자율주의, ATTAC, 시민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이들은 이제 노동운동의 중심성과 지도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노동운동이 연대의 역량과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난하며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심지어 노동운동을 싸잡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증표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제 노동운동은 자본가계급 및 이들의 시종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일부 진보세력으로부터도 배척되고 있다. 이는 노동운동의 진보성과 혁명성을 위해 불철주야 투쟁해 온 전사들과 지지자들이 보기엔 억울할 뿐만 아니라, 억지 주장일 것이다. 분명 그렇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일부 진보세력의 비난과 조롱을 억지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진보세력 내에서조차 노동운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장에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의 비난을 억지라고 치부하고 무시할 경우, 노동운동은 점점 왜소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 주장의 허구성을 증명하고 반박하거나 공격하는 것도 노동운동에 별 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격받는 사람들은 적이 된다는 이치는 진보운동세력들 사이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들의 비난과 비판의 정수를 진정으로 수용하며, 진보세력 전체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운동으로 스스로를 변혁하며 그리하여 다양한 진보세력의 공통된 비전을 새롭게 창출하고 변혁의 힘을 한 차원 높게 모아내는 데 기여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유망한 경로일 것이다. 그럴 때, 노동운동은 현재의 위기를 넘어서서 또 다시 진보운동의 유력한 축이 될 수 있으며, 다른 진보세력으로부터 존경받는 매력적인 연대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운동에 대한 다양한 진보세력들의 비판에 귀 기울이는 이상으로, 노동운동 자체의 발상전환과 변혁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럴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시작된 한국의 노동운동은 아직까지 전세계 진보운동 중에서 진보적인 건강성과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처럼 다양한 진보세력이 존경하며 연대하고 싶어 하는 노동운동이 되기 위한 노동해방의 발본적인 새로운 방향성과 비전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
2. 빼앗김의 두 가지 시공간: 착취와 수탈
노동운동의 목표가 노동해방이라는 데에는 대다수가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해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대체로 고전적인 좌파들은 임노동을 철폐하고 노동자가 자기노동 및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고,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 및 고르 등 탈노동패러다임의 주창자들은 노동자체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활동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전자를 노동 안에서의 해방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답으로 필자처럼,‘노동 안에서의 해방+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노동이 모든 부의 유일한 원천이며 잉여가치 내지 이윤의 유일한 원천이 임노동에 대한 착취라고 보는 사람들, 나아가 이러한 착취로 인해 자본주의에서의 임노동은 강제노동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노동해방은 무엇보다도 임노동에 기초한 착취로부터 벗어나 보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및 생산물)과 세상의 주인이 되는 ‘노동 안에서의 해방’일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노동해방의 주역은 임노동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사실 빼앗김에 대한 저항이나 이를 되찾는 운동에서, 빼앗기는 사람들만큼 열심일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동뿐만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모든 활동이 부의 주요한 원천이며, 모두가 사회적 부의 생산자이기 때문에 평균 이하의 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모두 착취를 당한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착취로부터 벗어나는 노동해방의 주역은 임노동자로 국한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청소녀(년), 학생, 가정주부, 이주자, 노령빈곤층, 장애인, 노숙자, 예술가 등이 임노동자보다 더욱 더 많은 착취를 당하며 따라서 변혁에 더욱 적극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임노동자는 임금을 받는 만큼 이들보다 덜 착취당하며, 따라서 상당부분 자본에 포섭되어 반동적일 수조차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동해방에 대해 화해하기 힘들게 보이는 두 가지 답으로 진보운동전략이 갈라지는 데에는, 부의 원천과 착취 내지 빼앗김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노동해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착취 및 빼앗김의 시공간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노동 안에서의 해방’에 주안점을 두는 노동중심주의자들은 대체로 스스로 맑스를 계승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며, 빼앗김을 당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임노동자들 뿐이라고 본다. 하지만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주장은 맑스의 것이 아니라, 맑스가 비판했던 라살레의 것이다.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는 라살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맑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 정도로 사용가치(그리고, 확실히 이것으로 물적 부는 이루어진다!)의 원천이며, 노동자체는 하나의 자연력인 인간의 노동력의 발현일 뿐이다.” 『자본』1권에도 유사한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 “따라서 노동은 자신에 의해 생산된 사용가치들 곧 소재적인 부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 윌리엄 페티가 말했듯이,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고 지구는 그 어머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들 곧 지구와 노동자를 파멸시킴으로써만, 사회적인 생산과정의 기술과 조합을 발전시킨다.” 이처럼 맑스는 자연이나 지구자체도 노동과 더불어 부의 원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면, 상당수의 맑스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이는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이 가치와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맑스을 주장을,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맑스에게 빼앗김의 시공간은 착취(Exploitation, Ausbeutung)의 시공간뿐만 아니라, 수탈(Expropriation)의 시공간도 있다. 착취의 시공간이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이라면, 수탈의 시공간은 노동과정과 다른 차원에서 빼앗김이 발생하는 모든 시공간을 지칭한다. 맑스는 『자본』에서 이러한 수탈의 예로 시초축적 시기 농민에 대한 영주의 토지수탈, 자본주의적 축적과 집중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수탈(흡수․합병 등), 그리고 신용제도와 주식회사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전체사회성원의 금융자산에 대한 소수 자본가들의 수탈 등을 들고 있다. 이 수탈의 시공간은 맑스의 예를 넘어서 확장될 수 있다. 미달러화가 세계기축통화로 작동함으로써 미국민 모두가 누리는 달러화 주조차익, 영어사용자들이 얻게 되는 특별수익은 국제적․지구적 차원에서의 수탈의 시공간이다. 한미FTA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저리의 미국채 등 유가증권으로 환류되는 것, 그리고 한국의 영어몰입주의는 이러한 수탈이 강압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기는 자들의 자발적이고 열렬한 욕망과 노력를 통해서 재생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부동산․증권투기차익, 가부장제사회에서 남성이 누리는 유리한 취업․승진기회, 내국인이 얻는 경제적 특권, 성인이 누리는 경제적 특권 등 각자의 노력과 무관한 경제적 특권이 작동하는 모든 시공간은 이러한 경제적 수탈의 시공간이다. 심지어 매력적인 외모, 유능한 배우자, 선망 받는 일자리와 지위, 타고난 좋은 지능․체력․소질,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누리는 경제적 특권도 모두 경제적 수탈의 시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모두 각자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생겨난 불평등의 원천인 것을.
3. 빼앗기는 사람들과 변혁의 주체
생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며 지속가능한 대안사회는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생겨나는 착취뿐만 아니라 모든 수탈도 폐지하며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각자가 실질적으로 최대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면 빼앗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변혁의 주역은 누구인가? 자본주의적인 착취뿐만 아니라 수탈의 시공간을 고려할 때, 빼앗기는 사람들이 임노동자로 국한되지 않는 점은 명확하다. 노동중심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더욱 더 많이 빼앗기는 사람들은 임노동자가 아닐 수도 있다. 특히 정규직 노동자는 더더욱 아니다. 실업자와 노령빈곤층은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으며, 제3세계로부터의 이주자들도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다. 대다수 청소녀(년)와 학생들도 임노동자보다 적게 빼앗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은 특히 더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을 것이다. 다수 여성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율주의나 탈노동패러다임에 서있는 고르 등이 생각하듯이 임노동자 특히 정규직 노동자 대다수가 빼앗는 사람들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고 따라서 최빈자에 비해서는 부동산이나 주택, 저축, 증권 등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므로 수탈을 덜 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착취의 시공간에서는 최빈자나 실업자에 비해서는 더욱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착취의 시공간인 노동과정에서 가장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적고 많음을 떠나서 빼앗기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90%를 넘어설 것이다. 소득만이 아니라 재산까지 고려할 때, 불평등지수가 특히 높은 한국에서는 빼앗기는 사람들이 95%를 넘어설 수도 있다. 그리고 이처럼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은 빼앗기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향한 변혁의 잠재적인 주체이다. 그리고 탈노동패러다임 옹호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더 많은 것을 빼앗기는 소수자들만이 변혁의 주역이거나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변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도주만이 아니라, 맑스의 말대로 ‘연합지성(assoziierter Verstand)’과 같은 긍정적인 대안을 구성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합지성은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 등이 중시하는 연결․접속·소통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집단적 능력과 대안사회를 위한 지적·정치적 연대와 연합의 능력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을 포함하여 다양하게 조직화된 정규직 노동자는 비록 상대적으로 덜 빼앗기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저항과 대안을 구성하는 변혁의 유력한 주체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포함하여 인구의 95%를 넘는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투쟁한다면 어떤 진보세력도 그들을 탓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운동세력은 모든 다른 진보세력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며, 연대파트너로서의 매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변혁은 실제로 그렇게 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착취당하거나 수탈당하는 사람들 곧 빼앗기는 사람들은 인구의 95%를 훌쩍 넘어선다. 임금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가장 많이 착취당하는 사람들이며, 장애인이나 빈곤노령층, 그리고 소년소녀가장들, 제3세계로부터의 이주자들은 가장 많이 수탈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영세자영업자, 가정주부, 대다수여성, 대다수 청소녀(년), 다수의 대학생, 징병된 군인들, 노숙자, 사회활동가들도 모두 수탈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금을 납부하며, 저축을 통해 자본가의 사업자금을 대고 그들의 상품을 소비하여 이윤이 실현되도록 도우면서 수탈당한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투기차익으로부터 배제되며 더 많은 집세와 더 많은 전세담보융자의 이자를 부담하면서 한 번 더 수탈당한다.
이들 빼앗기는 사람들 모두는 착취당하고 수탈된 것을 다시 환수하는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 임금노동자가 더 많은 헤게모니와 주도권을 갖는다는 선민의식은, 그들이 인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며 더구나 조직률이 10% 수준에 머무는 상황에서 위험한 독단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선민의식은, 착취당하진 않지만 더 많은 수탈을 당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들을 적으로 만들고 결국 노동운동을 고립시키고 왜소하게 만들 뿐 아니라 변혁을 위한 연대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이 임노동자 내지 프롤레타리아의 변혁능력을 특권화한 맑스의 변혁주체론은 변형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물론 곧이어 맑스는, “중간층, 소공업가, 소상인, 장인, 농민도 (...) 자신들의 프롤레타이아트로의 임박한 전환을 고려하여 미래의 이해관계를 방어한다면 혁명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분명 이는 “노동자계급과 대비해 볼 때 모든 계급들은 반동적인 대중일 뿐”이라고 본 라살레주의자의 편협한 노동물신주의를 훌쩍 뛰어넘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노동자를 제외한 수탈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투쟁할 때만 혁명적이라고 보는 것도 임노동자의 혁명적 능력을 특권화하고 비임노동자 전체를 주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맑스의 이러한 주장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중간층이 곧 임노동자로 전환될 것이라는 가설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간층이 끊임없이 임노동자로 전락한다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중간층은 그 이상으로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는 점을 자본주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임노동자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이들이 혁명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맑스의 가설은 새롭게 변형될 필요가 있다. 곧 자본주의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임노동자가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한 임노동자는 1,610만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인구 4,900만명의 33%수준에 불과한 숫자이다. 성인인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임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42%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선진국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후진국의 경우는 임노동자의 비율이 증가추세에 있다). 따라서 임노동자만으로는 헌법과 체제를 변혁하기에 역부족이다. 라살레주의자들은 이점에서 틀렸다.
그렇다고 중간층이 현재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미래의 이해관계를 위해 임노동자 편에 서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임노동자와 더불어 혁명적일 수 있다고 한 맑스의 말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현재 수탈당하고 있는 만큼 빼앗기고 있다. 그리고 빼앗기는 사람들은 모두 빼앗긴 것을 되찾는 데 적극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되찾음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대안사회가 착취뿐만 아니라 수탈도 폐지하여 빼앗김을 되찾고 각자 자유롭게 연합하는 사회라면, 그들은 굳이 임노동자 편에 서지 않고 현재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르더라도 대안사회를 향한 변혁에서 즉각 혁명적일 수 있다. 이는 변혁의 주체가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한 임노동자에 국한되지 않고, 실업자·도시빈민·영세자영업자·장애인·대다수 노령층·사회운동가·진보적인 지식인·대학생·청소녀(년)·대다수 여성·이주자 등을 포함한 인구의 95%에 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이 변혁운동에서 모두 평등하게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인구의 절대다수가 혁명적인 잠재력을 갖는다는 점은 대안사회의 실현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쉬운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농민·소상공인을 포함한 다양한 중간층이 노동자 편에 설 수 있으며 그럴 경우 혁명적이라고 함으로써 비임노동자의 혁명성을 조건부적으로 인정한 맑스는 라살레주의자의 노동물신주의를 넘어서고 있지만, 임노동자의 특권적 지위 내지 선민의식을 여전히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임노동자보다 인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비임금노동자에게 거부감을 조장할 뿐이다. 이는 임노동자 안에서의 단결을 강화할 수는 있지만, 비임금노동자와의 연대는 그만큼 어렵게 한다. 맑스의 예상과는 달리, 임노동자가 인구의 과반수에 못 미치며 더구나 조직률이 저하하거나 낮은 상태에서 이러한 주장은 노동운동을 고립시키며 혁명을 어렵게 만드는 작용을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임노동자의 혁명성에 대한 특권화는, 착취뿐만 아니라 수탈의 시공간이라는 이중적인 빼앗김의 시공간을 체계화한 맑스 자신의 논지에 따를 때도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의 주장은 ‘절대다수로 급증하는 임노동자 = 착취당하는 사람들 = 특권적인 잠재적 변혁주체’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히 20세기말 이후 급증하는 수탈당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변혁적 잠재력을 고려할 때, 이는 ‘절대다수의 착취당하거나 수탈당하는 사람들 곧 빼앗기는 사람들 = 평등한 잠재적 변혁주체 → 혁명의 현실적 가능성과 불가피성’이라는 일관된 변혁주체론으로 재구성되고 변혁될 필요가 있다. 맑스 자신이 이론화한 수탈의 시공간은 자신의 노동중심주의적인 제한된 변혁주체론을 넘어설 이론적 기초이다. 이처럼 맑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변혁할 자원을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1883년에 죽었지만 그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오래 살아갈 것이다.
물론 노동운동 특히 아직도 전지구적으로 가장 많은 건강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은 1996-7년의 영광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든든한 진지일 것이다. 비록 민주노총 등 다양하게 조직화된 한국의 정규직노동자들은 전체적으로 덜 빼앗기는 사람들일 수 있지만, 가장 잘 조직화되어 있으며 우리의 현대사에서 혁명적 잠재력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노동운동의 위기를 넘어 미래에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며 멀리 갈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의 노동운동은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노동운동이 배타적이며 특권적인 선민의식을 주장한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급속도로 사라질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만 해도, 임노동자들이 선민의식을 가져도 별 문제가 없었다. 당시 한국의 임노동자들은 가장 많이 빼앗기는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심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임노동자들의 선민의식은 노동운동의 단결을 낳는 긍정적인 요인이었지, 다른 운동·다른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고 그들과의 연대를 가로막는 부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1996-7년 개정노동법 반대 투쟁 때는,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이 민주노총을 존경하며 갈채를 보내고 심지어 연대하기까지 했다. 이 때만 해도 임노동자의 선민의식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특히 민주노총으로 조직화된 정규직노동자들의 경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특권을 가진 사람들로 간주되며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직노동자들의 선민의식 또는 노동중심주의는 다른 운동·다른 사람들의 질시를 유발하며 그들과의 연대를 가로막는 역할을 할 것이다. 오히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운동은 비록 상대적으로 덜 빼앗기는 사람들의 운동이더라도 잘 조직된 역량을 활용해, 자기 자신을 포함해 빼앗기는 사람들 전체의 운동으로 변혁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노동운동은 고립되고 왜소화되는 현재의 위기를 넘어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의 운동을 활성화하며 진보운동의 연대를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노동운동의 변혁과 기본소득
임노동자가 자신을 포함해 빼앗기는 모든 사람들의 운동을 활성화하며 진보운동의 연대를 확장하려면, 그럴 수 있는 계기를 만들거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계기로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생태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며 지속가능한 대안사회의 비전을 창출하고 공유하는 것은 이러한 연대의 확장과 진전을 위해서 필수적인 계기 중의 하나일 것이다.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95%에 이르는 상황에서 착취와 수탈을 근절하고, 기존의 경제성과 중에서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던 부분(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사회전체성원이 공동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경제적 부의 원천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은 가장 급진적이지만 동시에 95%의 인구에게 더 나은 경제적 부를 약속함으로써 잠재적인 연대의 폭을 최대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21세기 코뮌주의의 새로운 경제모델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맑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코뮌주의 저차국면에 대해 ‘노동성과(Arbeitsleistung)에 따른 분배’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원리를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코뮌주의 고차국면에 대해서는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를 중심적인 경제원리로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코뮌주의 저차국면의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 원리는 필요에 따른 분배의 측면에서 현재의 서유럽 사민주의에 못 미치고, 고차국면의 ‘필요에 따른 분배’ 원리는 경제적으로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기획이다. 왜냐하면 일한 성과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필요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받는다면, 사회전체적으로는 노동유인이 크게 감퇴하여 경제적 성과가 크게 감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코뮌주의 고차국면의 분배원리는 게으른 사람들 내지 이기주의자들의 역설을 초래할 것이다. 곧 이러한 모델이 실현되면 헌신적인 사람들이 게으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에서보다 적어진 파이 중에서 더욱 많은 것을 빼앗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는 맑스가 생각했던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이나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로서의 코뮌주의와는 정반대로, 각자의 이기주의가 조장되고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맑스의 코뮌주의 저차국면에서는 사회전체의 가처분소득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성과를 낳는 노동자들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곧 여기서 노동자들은 압도적인 경제적 특권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코뮌주의 저차국면의 경제원리와 사회전체성원이 필요에 따라 동일한 분배를 받는 맑스의 코뮌주의 고차국면의 경제원리 사이에는 순조로운 이행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넘기 힘든 간극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코뮌주의 저차국면에서 새로이 경제적 특권층으로 부상할 노동자들 대부분이 그러한 경제적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리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가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맑스적인 ’코뮌주의 두 가지 시공간의 역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주의자들의 역설’과 더불어 ‘코뮌주의 두 가지 시공간의 역설’은 맑스의 코뮌주의 경제원리가 갖는 난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역설을 낳는 맑스의 코뮌주의 경제모델을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맑스의 코뮌주의 경제모델은 우월하고 지속가능한 21세기 대안경제모델을 위한 원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두 가지 시공간으로 분리된 맑스의 코뮌주의 두 가지 경제원리는 변형되어 하나의 시공간에 통합된 단일의 경제원리로 변혁될 필요가 있다. 곧 21세기 대안경제모델은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 + 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 다시 말하면 ‘노동소득(가처분총소득의 50% 수준) + 사회연대소득 내지 코뮌주의적 기본소득(가처분총소득의 50% 수준)을 통한 능력에 따른 노동의 촉진’으로 변혁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제원리는 ‘노동소득(사실상 가처분총소득의 40% 수준) +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사실상 가처분총소득의 60% 수준)’을 낳는 현대 자본주의적 경제원리에 비해 더 많은 노동유인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성과를 촉진할 수 있다. 그리고 당장의 경제적 효용보다는, ‘생태예비의 원칙’ 및 ‘생태우선성의 원칙’에 따라 무공해에너지 및 생산물의 내구성제고를 우선적으로 촉진한다면 생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월등히 우월한 성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생산수단 및 토지의 사회적 공유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21세기 대안사회의 경제적 비전은 최대다수에게 최대의 공동이익을 낳으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착취받는 사람들과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최대로 확장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물론 이처럼 최대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목표의 한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에는 현재의 시공간에서 이러한 21세기 대안경제모델로 이행할 때 기반이 될 수 있는 경제적 조건 및 정치적 실행 조건이 결부될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당장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힘들다면, 과도기적으로 자본주의적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생태세 및 토지세를 통해 전체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의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를 사회적으로 환수하여 가처분총소득의 30% 수준에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고 이 비중을 점차 확대하는 방안도 유력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방안은 주식 등 불로소득/투기소득의 원천이 되는 자산의 가격을 하락시키게 될 것이며 따라서 현재 한국사회에 적립되어 있는 250조원 수준의 연기금 등을 통해, 그리고 기업에 대한 은행대출(사실상 사회전체성원의 예금으로 이루어진 공동자산이다)의 주식으로의 전환 등을 통해 상장사뿐만 아니라 모든 주식회사를 사회적 공동소유로 전환할 수 있는 유리한 경제적 환경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생산수단의 압도적인 부분이 사회적 공동소유로 전환된다면 그 때의 주된 기본소득재원은 기존 자본주의적 이윤(이자+배당+지대)의 전환된 형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과도기적 기본소득전략조차도 정치적 실행조건과 결부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변혁주체의 형성과 변혁의 실행은 다양한 계기를 통해서 만들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기본소득 자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급진적인 기본소득운동은 변혁주체의 형성에 막대하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생소함에서 오는 냉소주의가 클 수 있지만, 인구의 90% 이상에게 이익이 되는 가시적인 기본소득의 비전은 잠재적인 수혜자들이 빠른 속도로 기본소득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될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지금까지 진보운동이 경험하지 못한 최대다수의 진보적인 연대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등의 경험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 불과 5년 전만 해도 인구의 99%에게 생소했던 기본소득은 이제 인구의 90% 이상에게 알려지고 그들 중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는 아젠다로, 그리하여 실행가능성이 높은 사회적 요구로 변화되었다.
최근 한국 기본소득운동의 경험도 진보적인 정치주체의 형성과 확장에서 급진적인 기본소득의 아젠다가 큰 역할을 하게 될 수 있음을 언뜻언뜻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09년 2월에 기본소득네트워크(cafe.daum.net/basicincome)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민주노총에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가 출간되면서,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은 적어도 진보적인 운동과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젠다의 하나로 부상했다. 여기에는 노동소득에 대한 추가과세는 최소화하고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대한 과세 및 토지세를 강화하여 GDP의 30% 수준에 달하는 291조원 이상의 재원을 마련함으로써, 무상교육 및 무상의료와 더불어 5년 이상 한국에 거주한 외국인 및 모든 국민들에게 1인당 평균 연 500만원 이상을 지급하자는 한국형 기본소득모델이 제시되어 있다.이 모델에 따를 때, 기존 과세대상소득(명목소득보다 낮다)이 1억원 이하인 2인 가구는 세액증가분보다 더 많은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 따라서 대다수 정규직노동자들도 기본소득으로 인해 잃는 것보다 받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이 모델대로 기본소득이 실현되면, 국내 인구의 90% 이상이 이익을 보게 된다. 특히 노동소득세 증세는 최소화하고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가능한 한 많은 과세를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노동소득이 많은 정규직노동자들 거의 대다수도 이익을 보게끔 설계된 점이 이 모델의 강점이다. 이는 기본소득이 정규직노동자를 포함한 압도적인 대다수의 것이 되며 최대다수의 최대의 연대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아직 민주노총에서 기본소득을 조직의 강령이나 정책으로 수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동운동계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책자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전지구적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그만큼 한국의 노동운동이 특권화된 노동중심주의를 벗어날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기본소득은 사회당에서 부속강령으로 채택되어 있으며 교수노조에서 3대 정책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장애인운동,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민주노총 및 민주노동자연대, 자율주의운동에서도 점차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운동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본격적으로는 채 1년이 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기본소득운동이 진보운동 내에서 지금까지 낳은 파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생태운동, 여성운동, 청소녀(년)운동, 빈민운동, 실업자운동, 학생운동, 심지어 새로운 노령층운동에서 기본소득은 새로운 진보운동의 주체들 그리고 그들의 연대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이 많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특히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중과세와 생태세 및 토지세에 기반한 급진적 기본소득은, 그 동안 모호했던 자본주의적 착취와 수탈 그리고 이를 다시 되찾아와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간결하고 강력하게(simple and powerful)’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본소득은 정규직‧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한 임노동자의 것이기도 하다. 노동소득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을 추가로 받게 될 그들의 압도적인 대다수는 덜 일해도 더 많은 소득을 올리며, 무상교육‧무상의료‧무상보육, 낮아진 주택비용 등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부를 향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부모 부양부담의 축소 등을 감안하면, 그들이 누리게 될 경제적 부는 더욱 커질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민중전체를 위해 굳건히 싸워왔던 한국의 노동운동은, 기본소득운동과 만남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민중에게 거대한 희망을 주게 될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거대한 진보의 연대를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세계가 막대한 달러주조차익을 미국에게 갖다 바치며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미달러지배체제를 넘어서서, 세계단일통화를 도입하며 이의 발행량 중 일부를 전지구적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하자는 후버(Huber) 내지 프랭크만(Frankman)의 제안 등과 결합하여 지구적 차원에서도 진보의 새로운 연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Van Parijs, 2006: 46쪽 및 Frankman, 2006: 60).
기본소득이냐 아니냐보다 어떤 기본소득인가가 더욱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기본소득은 21세기에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보의 새로운 희망과 연대를 확장할 아젠다이다. 그리고 19세기의 노예제 폐지, 20세기의 보통선거권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경제적 영역으로까지 확장할 기본소득의 실현은 21세기의 가장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 될 것이다(Supplicy, 2006: 37쪽). 19세기와 20세기에 진보의 가장 강력한 축을 이뤘던 노동운동이 21세기에 기본소득운동 그것도 최대한 급진적인 기본소득운동과 만나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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