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완성의 지렛대, 기본소득1)
최광은 / 사회당 대표,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
1. 노동 ․ 복지 패러다임의 대전환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해서는 기존의 ‘임금노동형 완전고용 패러다임’을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선별적, 시혜적 복지 패러다임’을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이렇게 기존의 지배적인 노동 패러다임과 복지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 획기적인 특징이 드러난다.
여기서 임금노동형 완전고용 패러다임이라 함은 노동 일반을 임금노동으로 전제하고 완전고용을 목표로 하는 고용 중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것이고,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은 이와는 달리 노동을 임금노동으로 전제하지 않고 더욱 폭넓은 개념으로 다시 정의하며, 고용을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중심에 놓는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을 일컫는다. 이렇게 사회적 필요를 중심에 놓는다면 노동의 질적 성격을 문제 삼는 것이 가능하고, 다양한 사회적 가치들이 노동사회의 재구성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생긴다.
그리고 선별적, 시혜적 복지 패러다임은 자본주의 국가 일반의 국가복지 영역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각종 심사와 조건을 동반한 공공부조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다.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은 이와 달리 국민 또는 시민이라는 보편적 자격에 근거하여 기본적인 복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아동수당, 학생수당, 노령연금 등과 같은 보편적 사회수당의 형태로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 문제를 서두부터 언급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의 영역이 존재하고, 이에 따라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 또한 대체로 양극화의 경향을 띤다는 사실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패러다임 사이에 공약가능성(commensurability)의 영역도 있고, 여러 전이와 변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단계론적 사고나 양질전화와 같은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전제로 한 점진적 실현 전략이나 포위 전략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목표에 대한 합의와 구체적인 경로 혹은 수단 사이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며, 이때 여러 경로 및 수단이 충분히 경합을 벌일 수 있다.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이어 어떤 기본소득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이고, 어떻게 기본소득을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뒤따른다.
2. 복지국가의 위기와 대안적 소득 보장 논의의 활성화
전후 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특징 지웠던 것은 복지국가2)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1970년대 이후 세계 경제의 침체와 함께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공공부조와 사회보험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복지국가 모델이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조건 자체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전후 ‘황금시대(Golden Age)’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포디즘적 축적체제와 이를 토대로 한 전례 없는 호황이었다(Glyn, 2006[2008]: 17).
당시에는 이러한 체제를 근간으로 완전고용이 추구될 수 있었으며, 탈빈곤 프로그램 또한 작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포디즘적 축적체제가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그 바탕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었던 복지국가 모델이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리하여 복지국가는 차츰 잔여화(residualized)되었고, 시민의 보편적 권리는 수혜 요건을 갖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Crouch, 2004[2008]: 37).
복지국가 이론의 권위자인 에스핑 안데르센(Esping Andersen) 또한 1980년대 이후 실업과 불평등 해소에 가까이 다가섰던 스웨덴 모델과 독일 모델조차 약화하거나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면서 “1979년 이후에는 기존의 어떤 제도적 모델도 완전 고용과 균형 성장을 동시에 이룩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보았다(정이환, 2006: 61).
이렇듯이 공공부조와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국가가 오늘날 경제적, 사회적 한계에 다다르자 이러한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응하여 다양한 대안적 소득 보장 논의가 활성화되었는데3), 크게 두 가지 방향의 대응 방식이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과 복지를 연계하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4)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연계 자체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흐름이다. 전자의 흐름은 다시 노동력 구속모델과 인적자본 개발모델로 나뉘는데(이명현, 2006: 58-59), ‘노동소득세액공제(Earned Income Tax Credit, 약칭 EITC)’5) 제도는 노동력 구속모델의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본소득(Basic Income)’이다.6)
3. 노동연계복지의 실패와 기본소득의 부상
노동연계복지는 복지와 생산, 그리고 노동을 연계하려는 사고방식으로 일정 수준의 사회보장을 통해 노동시장 속에서 시장의 규율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면 복지 영역의 확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전통적인 복지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측면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복지에서는 필요가 인정되면 급여를 지급하고 자산조사를 하는 경우는 있어도 급여가 필요해진 원인을 문제 삼지 않고 급여의 원인이 되는 사태와 관계없는 별도의 조건을 부과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연계복지는 보통 노동시장 유연화와 쌍을 이루어 추진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고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 유인을 높이는 것과 함께 노동시장 유연성이 더욱 증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노동시장의 경직성에서 실업의 원인을 찾는다면 197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실업률이 미국보다 낮았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이후 유럽의 노동시장 유연성이 점차 증가하였음에도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 또한 설명할 수 없다(정이환, 2006: 63).
반면,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 노동과 복지를 연계시키는 이러한 사고와 정반대 편에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기존의 노동연계복지가 실패했다는 것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노동연계복지7)와 관련한 미국과 유럽에서의 경험적 연구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 가운데 소수 사람만 구제해줄 뿐이며, 행정적 실패와 관료주의 강화를 낳는 등 많은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Handler et al., 2006).
한국에서도 이러한 노동연계복지는 동일한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2009년부터 시행된 ‘근로장려세제’이다. 그리고 2000년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기본원칙들 가운데 자활사업 참여를 조건으로 한 생계급여 지급 등과 같은 원칙은 노동연계복지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 제도에서 강조하고 있는 “생산적 복지”는 노동연계복지의 우회적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기본소득 비판의 논리
기본소득에 대한 다양한 비판의 논리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기본소득 개념이 발전해오는 동안 이에 대한 비판의 논리 또한 매우 다양하게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비판은 보수 진영한테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진보 진영 내에서도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발견되었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이 가해졌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큼에도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의 논리를 공유하는 예도 있다. 또한, 현재의 노동 패러다임과 복지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구체적 방법과 달성 수단 등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흐름도 있다. 아무튼,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매우 다양한 비판의 논리가 존재하며, 각각이 서로 연동하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를 일목요연하게 구분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을 큰 범주에서 윤리적 비판과 기술적 비판으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다. 스페인 기본소득네트워크의 대표이자 바르셀로나 대학 교수인 다니엘 라벤토스(Daniel Raventós)는 이러한 비판을 아래와 같이 11가지로 분류하면서 다시 반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1번에서 7번까지를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 8번에서 11번까지를 윤리적으로는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의 범주로 묶고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Raventós, 2007: 177-198).
1. 기본소득은 기생(parasitism)을 부추긴다.
2. 기본소득은 성별 분업을 종식하지 못할 것이다.
3. 기본소득이 있으면 몇몇 힘든 일자리는 모든 사람이 거부할 것이기 때문에 빈국으로부터 온 싼 임금을 받는 이주노동자들이 그 빈자리를 모두 채울 것이다.
4. 기본소득은 노동 인구의 이중화를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5. 기본소득은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과 같이 부유한 나라들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다.
6. 기본소득은 노동 윤리를 파괴할 것이다.
7.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야기된 부당함을 종식하는 수단으로서는 부적합하다.
8. 기본소득은 감당할 수 없는 재정 문제를 발생시킨다.
9. 기본소득은 빈국에서 부국으로의 이주를 촉진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10. 기본소득은 만일 그 지급액이 매우 작으면 기대한 큰 효과들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11. 기본소득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발생시킬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이러한 비판 논리를 여기서 모두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이 중 상당수에 대해서는 이미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충분한 반박 근거들을 제시해왔다. 그리고 이 중에는 가치 판단의 영역에 속하거나 선험적으로 예단하기 어려운 문제 또는 서로 상반된 주장과 근거들이 경합을 벌이는 문제도 일부 있다. 여기서는 다만, 진보 진영 내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독일에서 기본보장(Grundsicherung) 지지자들의 기본소득 비판과 한국에서 사회임금 확대 주장자의 기본소득 비판이다. 이는 기본소득에 대한 조건 없는 반대 혹은 비판과 달리 기본소득과 경합을 벌일 수 있는 대안의 형태를 제기하는 가운데 기본소득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다.
먼저 기본보장의 입장을 보자. 독일의 좌파당 다수파, 사회민주당 좌파, 녹색당, 노동조합 등에서 많은 지지자가 있는 기본보장은 임금노동을 전제로 한 실업급여처럼 노동과의 연계가 강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노동연계복지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성격을 지닌다. 기본보장의 수혜 대상은 소득이 낮거나 재산이 적은 (개인이 아닌) 가구이며, 수혜를 받기 위해서는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들 기본보장 지지자들이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기본소득이 현재의 정치 지형에서 다수를 얻을 가능성은 없다. △기본소득보다는 최저임금제의 강화와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등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임금노동 중심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기본소득은 임금삭감을 조장하는 콤비임금8)의 일종이다(곽노완, 2009: 60).
다음으로, 사회임금 확대 주장을 보자. 오건호(2009a, 2009b)는 진보적 대안재정전략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의제로 사회임금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급여를 총괄한 개념적 범주로서의 사회임금9)은 전통적인 복지국가 모델에서 추론된 대상별 필요복지를 주장하는 것으로서 실업, 보육, 주거, 연금 등 계층별/집단별 필요에 따라 복지를 제공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임금 확대 전략이 기본소득과 비교하면 소득재분배 효과가 더욱 크고 필요 재원도 줄일 수 있다며, 추가로 기본소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초생활급여, 실업급여 등이 무차별 기본소득으로 통합되는 것이 과연 형평성에 맞는가. △사회복지 인프라가 시장화되어 있는 한국에서 현금 복지 중심의 기본소득이 애초 취지를 이룰 수 있는가. △기본소득이 비판하는 복지행정비용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가(오건호, 2009b: 46).
그러나 오건호의 이러한 비판은 서로 다른 전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복지국가 수준으로 사회임금을 확대하는데 드는 재원보다 기본소득 시행을 위한 필요 재원 규모가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본소득은 더 많은 증세와 조세 체계의 개혁, 행정비용의 절감 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 재원의 크기를 놓고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필요 재원의 크기가 작을수록 현실성이 커진다는 논리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사회임금이 기본소득보다 소득재분배 효과가 크다는 주장도 양자의 재원 규모가 같다는 가정을 하거나 기본소득이 대상별 필요 복지를 대체한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올바르다. 같은 재원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것과 필요한 일부에게 나눠주는 것을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큰데, 이것은 그냥 산수 결과의 확인일 뿐이지 기본소득 비판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일부 기본소득 비판자들은 현물급여가 현금급여보다 소득재분배 효과가 크다는 주장을 펴는데10), 이는 재원 마련의 방법, 조세 체계, 급여 수준에 따라 차이가 큰 것이고, 기본소득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 자유주의자들을 제외하면, 현물급여 중심의 기존 복지체계를 해체하여 기본소득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과녁이 빗나간 비판일 수밖에 없다.
5. 복지국가의 한계를 넘어 복지국가의 완성으로
독일에서 기본보장을 주장하는 것과 한국에서 사회임금을 주장하는 것은 물론 서로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지만, 기본소득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은 같다. 그리고 전자는 기존 복지국가 모델의 보완을 지향하고 있고, 후자는 기존 복지국가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처럼 기존 복지국가의 한계 자체를 뛰어넘어 복지국가를 실질적으로 완성하려는 시도에 대해 의문을 표하거나 최소한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편, Bergman(2004)은 재정적 실현 가능성을 문제로 삼으면서 복지국가 모델과 기본소득을 양립시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며, 가까운 미래에 특히 미국과 같은 곳에서는 복지국가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복지국가가 충분히 확립되고 자본주의가 더욱 고도로 발전한 다음에야 비로소 기본소득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의 논리는 정치적, 재정적 실현 가능성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고,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 이전에 기본복지의 충족을 우선적인 과제로 놓으면서 기본소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려는 것은 기본소득이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의 정수로서 양자가 깊은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의 확산은 기본소득의 실현 가능성을 높여주고, 거꾸로 기본소득 담론의 확산도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기본소득과 기본복지를 꼭 선후의 문제로만 보지 말자는 것이며, 동시에 추진할 수만 있다면 좋은 그런 종류의 관계로도 보지 말자는 것이다. 즉,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속에서 기본소득과 기본복지의 실현 가능성이 함께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 착목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과 기본복지는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이라는 하나의 뿌리가 둘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수 교수는 약간 다른 측면에서 기본소득제 주장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한국처럼 사회 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는 너무 앞서가는 주장일 수 있다는 게다. 당장 시급한 복지 현안이 추상적인 쟁점에 가려질 수 있다는 것. 이 교수는 “복지제도가 이미 다양하게 갖춰져 있는데, 이게 너무 복잡해서 간결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기본소득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텅 빈 백지 위에 다양한 복지제도를 채워 넣어야 할 단계라는 생각이다.”11)
기본소득에 대한 위와 같은 종류의 비판도 앞서 언급한 비판의 맥락과 이어지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 던져볼 수 있다.
간결하게 정리할 필요가 생길 때까지 복지제도가 너무 복잡해지도록 하자는 주장은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기계 이전의 도구를 사용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제 막 기계의 도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낡은 기계를 사용하던 나라가 최신 기계를 도입했다. 이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옆에 최신 기계가 있음에도 낡은 기계를 골라야만 할까. 낡은 기계를 사용한 다음에야 비로소 최신 기계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만 할까.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해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국가가 경험했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실질적인 완성을 지향한다. 그리고 충분히 그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필요성, 정당성, 가능성의 세 측면에서 자기 논리와 그 근거를 보다 충분하고 세밀하게 마련하며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해 나간다면, 기본소득 제도의 실현은 그리 먼 일만은 아닐 것이다.
[미주]
1) 이 글은 가톨릭대 사회복지연구소 주최 2009년 추계 학술 심포지엄(2009년 11월 11일) <기본소득 도입의 가능성과 정당성>에서 발표한 토론문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미래”를 대폭 수정․보완한 것이다.
2) 한국을 복지국가로 정의하려는 시도 또한 존재한다. 구인회(2008: 169-172)의 경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는 10년 기간을 한국의 복지국가 등장기로 보고 있다. 그는 이 기간의 사회정책이 경제발전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에서 사회권과 재분배 실현이라는 독자의 목표를 갖는 국가정책으로 등장했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이 개발국가에서 복지국가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남찬섭(2008: 185-186)도 이러한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을 비교해 볼 때 한국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고, 이를 1인당 소득 수준이 같았던 시점과 비교해 보더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복지국가의 위상은 매우 낮다고 평가한다. 특히, 소득보장의 영역은 더욱 후진적인데, 단적인 예로, 한국 가구의 가처분소득 대비 공적 이전 소득의 비율은 3.6%에 지나지 않고, 공적 이전에 따른 불평등 지수의 감소 효과도 0.011에 불과하다. 반면, OECD 평균은 각각 21.4%와 0.078이다(김교성, 2009: 38). 따라서 여기서는 한국을 복지국가로 정의하지 않는다. 양과 질의 측면 모두에서 한국은 아직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국가복지의 영역이 조금 확장되었다고 해서 복지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의 본격화에 대한 완충 장치로 기능을 해온 것이다. 게다가 이것조차 비가역적 제도로 정착된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심지어 후퇴하는 가역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3) 물론 복지국가의 위기 이전에도 대안적 소득 보장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로버트 테오발드(Robert Theobald)가 주장한 연간소득(Annual Income) 보장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했다(Rifkin, 1995[1996]: 338에서 재인용). “자동화가 계속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노동력 대체를 가져오기 때문에 소득과 노동 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파괴할 필요가 있다. 기계가 더욱 더 많은 노동력을 대체함에 따라서 사람들은 공식 경제에서의 취업과는 별도로 소득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의 생존이 보장되고 경제는 생산된 서비스의 소비에 필요한 구매력을 갖게 된다.” 한편, 김진구(2001)는 복지국가 위기 이후의 대안적 소득 보장 논의를 로버트 해브만(Robert Haveman)의 분류를 기초로 CIT(Credit Income Tax), NIT(Negative Income Tax), EITC(Earned Income Tax Credit), BIG(Basic Income Guarantee) 등 네 가지로 나누어 비교, 소개하고 있다.
4) 이 용어는 시민운동 지도자인 제임스 찰스 에버스(James Charles Evers)가 1968년에 처음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69년 8월 리처드 닉슨이 한 텔레비전 연설에서 이 용어를 쓰면서부터였다. 노동연계복지 안에서도 크게 두 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인 고용을 강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적 자본 개발에 역점을 두는 것이다.
5) 이 제도는 소득에 따른 공제액을 설정하여 해당 노동자가 낸 세금이 공제액보다 많을 때는 공제액만큼을 차감한 금액만 내도록 하고 반대로 공제액보다 세금이 적을 때는 오히려 그 차액을 현금으로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을 해야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이 제도가 가장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는 곳은 미국인데, Shipler(2005[2009]: 35-38)는 이것의 실상과 허점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근로소득보전세제’라는 이름으로 이 제도의 도입을 결정했으며, 이명박 정부는 이를 ‘근로장려세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2009년에 처음 시행하였다.
6) ‘기본소득’과 함께 후자의 예로 언급되는 것에는 ‘사회적 지분급여(Stakeholder Grants)’가 있다. ‘기본소득’과 ‘사회적 지분급여’ 양자는 시민권에 근거한 제도라는 점, 조건 없음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 등의 공통점이 있지만, 지급 방식이나 제도의 목적, 설계, 예상 효과 등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제도이다(서정희․조광자, 2008). ‘사회적 지분급여’의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Ackerman et al.(1999, 2004)이 있다. 양자를 놓고 비교할 때 Van Parijs(2006)는 ‘기본소득’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고, Ackerman et al.(2006)은 ‘사회적 지분급여’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Wright(2004)는 양자 사이의 상대적 차이를 계급 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의 측면에서 분석하는 가운데 ‘기본소득’이 계급 관계의 변화에 더욱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본다.
7) Handler et al.(2006)은 여기서 ‘노동연계복지(Workfare)’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ies)’ 혹은 ‘노동시장 활성화(Activation)’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8) 임금과 국가의 임금 지원금의 결합을 콤비임금(Kombilohn)이라고 부른다. 콤비임금은 노동의 성격이나 방식을 문제로 삼지 않으며, (최)저임금에 대한 보조금의 성격이기 때문에 임금삭감과 사회복지의 해체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최)저임금에 대한 보조금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자의 협상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콤비임금과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Blaschke, 2006[2009]).
9) 여기서 말하는 사회임금은 현금 복지 급여와 현물 복지 급여를 합한 사회적 급여를 말하는 것으로 사회복지 수혜액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사회적 공장(social factory)’, ‘사회적 노동자(social worker)’ 등과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제시한 ‘사회적 임금(social wage)’과 다른 것이다. 다음의 인용은 이 ‘사회적 임금’이 오히려 기본소득 구상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Hardt et al., 2000[2001]: 509). “사회적 임금에 대한 요구는 자본 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활동을 동일한 보상으로 인식하므로, 사회적 임금은 실제로 보장된 수입이라는 요구를 전체 주민에게까지 확장시킨다. 일단 시민권이 모두에게 확대되면, 우리는 이 보장된 수입을 시민권 수입, 즉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각자에 대한 응당한 지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0) 좌혜경(2009: 2)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대표적인 예로 언급할 수 있다. “현물급여는 현금급여보다 소득재분배 효과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남. 2008년 조세연구원에 따르면, 2006년 현재 공공부문에 의한 소득재분배 효과는 13.64%에 달함. 이중, 현물급여가 7.02%p로 소득세 3.52%p, 기타사회보장수혜 2.26%p에 비해 상당히 높은 소득재분배 효과를 보여주고 있음.”
11) 프레시안. 2009년 9월 4일. “국민 10%만 손해 보면, 실업자도 월급 받는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10년 토론회”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90411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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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2월 11일 중앙대에서 열리는 제2회 보건복지연합학술대회 중 복지 세션 '기본소득의 경제적 효과'를 위한 토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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