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5-24 00:26
[사회]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채만수 소장의 기본소득 전면 비판
 글쓴이 : 사무처
조회 : 6,362  
   채만수_소장의_기본소득_전면_비판.hwp (65.5K) [31] DATE : 2014-05-24 00:36:40

맑은사람|조회 170|추천 0|2010.02.23. 12:01http://cafe.daum.net/basicincome/3ol8/182 

과학에서 몽상으로 사회주의의 발전ㆍ발전ㆍ발전!


[정세와노동]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2010. 1. 27-29)에 부쳐


채만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 2010년02월22일 13시13분

 

 

I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엥겔스는 1880년에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이라는 소책자를 썼고, 맑스는 그 책의 서문에서 이를 “과학적 사회주의의 입문서”1)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채 한 세기 반(半)도 격하지 않은 이 시대, 이 오랜 반동의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교수들, ‘진보적’ 활동가들은 마침내 ‘과학에서 몽상으로’ 사회주의의 위대한 발전을 성취해내기에 이른 것 같다. 여러 ‘진보적’ 학술단체들, ‘진보적’ 정당들, ‘진보적’ 언론들이 후원하고 선전했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겠지만, 지난 1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이른바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이야기다.


다름 아니라,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교수들, ‘진보적’ 활동가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와 우리 시대를 둘러싼 낡은 족쇄를 끊어내고 인류가 쟁취해야 할 세계사적 과업을 실천하는 사람들,”2)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세계사적 과제로 기본소득 쟁취를 들고 나온 사람들”3)이 우르르 그 소위 ‘학술대회’에 몰려가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대안”(!), “위기의 폭이 넓고 깊은 만큼” “더욱 근본적이고,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대안”(!),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요구, 대중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요구”(!)를 외치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라는 요구를! “기본소득”이라는 대안을!


‘참가자 일동’의 ‘선언’에 의하면, 아니,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기본소득”이란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어떠한 심사나 노동 요구도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선별적이고 잔여적인 복지 패러다임을 넘어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을 완성하는 지렛대이며, 완전고용이라는 가상과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의 전일화로부터 탈피하여 노동사회를 안팎으로부터 재구성할 촉매제이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현금소득으로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하려는 시도도, 분배의 개선만으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기본소득의 보편적 성격은 그것에 기존의 소득들과는 다른 새로운 힘을 부여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들을 만들어낸다.


새삼스레 느끼는 바이지만, 아- 인지(人智)의 위대함(!)이여! 장기간의 대반동의 파괴적 위력이여!

게다가 그 “필요성과 정당성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과 현실성 또한 충분히 고려하고 있”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해왔”다니, 한없는 찬사와 존경을!


II

우선 나는, ‘선언’의 ‘참가자 일동’이 자신들을 “기본소득을,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하는 사람들”로 규정하는 대목을 특히 주목한다. 바로 이 대목에야말로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교수들, ‘진보적’ 활동가들의 몽상뿐만 아니라 저들의 기만과 사기, 그리고 필시 제기될 비판을 ‘오독(!)에 기초한 비판ㆍ비난’이라고 맞받아칠 간교한 장치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령 없이 거듭 중복되는 인용에 양해를 구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방금 본 것처럼, 저들은 자신들이 얘기하는 이른바 “기본소득 쟁취” 혹은 “기본소득 ... 제도화”를 “우리와 우리 시대를 둘러싼 낡은 족쇄를 끊어내고 인류가 쟁취해야 할 세계사적 과업,”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세계사적 과제,”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대안,” “위기의 폭이 넓고 깊은 만큼” “더욱 근본적이고,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대안,”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요구, 대중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요구”로 규정한다. 그러면서도 바로 뒤에서는 간교하게도 이를 “...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 운운하고 있다.


이렇게 “기본소득을”, 아니, 보다 정확히는 저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 쟁취” 혹은 “기본소득 ... 제도화”를, “대안사회” 그 자체의 기본적 분배제도가 아니라, “...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한다고 할 때, 저들이 아무리 “글로벌 시대의 지속 가능한 유토피아와 기본소득”4) 운운하더라도 그것을 과학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오독에 기초한, 비판 아닌 비난”이라고 되받아칠 근거를 저들은 갖게 된다.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것은 고사하고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가 생생하게 살아 있더라도 저들은 당당한(?) 변명의 근거를 갖게 된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염치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했을 뿐”이라고 능히 변명하고 되받아치고도 남을 위인들이니까 말이다.


III

저들은, ‘기본소득 서울 선언’에서 “... 소득이 없거나 형편없는 소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수많은 대중이 존재하는 현실은 기본소득을 사회적 의제로 강력히 밀어올리고 있다”면서, “이러한 지구적 차원의 흐름에 발맞춰 한국에서도 비로소 기본소득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며, “서울에서 열리는 이번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는 기본소득 의제의 확산을 위한 커다란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대회’ 후에도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가 ... 성황리에 개최되었”으며, “대회가 남긴 성과는 적지 않습니다”5)고, 자못 의기양양이다. 결국 수많은 대중이 자신들을 따르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대중이 자신들을 시종(侍從)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수많은 대중이 자신들의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기울 일 것이라는 주장 자체가 물론 망상이다. 하지만 원체 제정신을 놓기를 강요하는 대반동의 시대인지라 혹시라도 동요할지 모를 일부 ‘대중’을 위하여, 엥겔스가 적절하게 언명한 것처럼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서 창을 겨누는 것이야 그의 직분이고 그의 역할이지만, 산초 판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기”6) 때문에 저들의 노는 꼴을 잠깐만 보도록 하자.7)


(1) “현대적인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해왔으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국제위원회 의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이 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방한했”다는 필립 판 빠레이스(Phillippe Van Parijs) 벨기에 루뱅대 경제사회윤리학과 교수님의 논의


그는 (야닉 판더보트[Yannick Vanderborght] 교수와 연명으로) “기본소득, 지구화와 이주”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자본과 상품, 사람들과 발상들이 국경을 가로지른다고 언급되는 시대인 지구화의 시대 즉 21세기에 ... 이와 같은 새로운 맥락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전망들은 이전과 크게 바뀌지는 않았는가,” “진정 그러한 전망들이 급격히 퇴색되지는 않은 것인가”8) 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나선, “하나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특수하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지구화의 많은 양상들 중,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위협이 되는 것은 초국가적인 이주”9)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가장 확실한 위협”이란 주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기본소득을 축적하기 위해 필요한” 기금 조성에 대한 “국적을 초월한 실질적, 잠재적인 이주가 촉발할”10) 위협들인데, 이런저런 너절한 논의 끝에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진실로 우리는 기회주의적인 이주와 다종족성에 대항하여, 굳건한 국경에 의해 안락하게 보호되는 닫힌 동일성의 사회에서, 관대한 결속이 더 생각하고 실행하기 쉽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을 가지면서, 우리가 직면하는 도전에 대한 세 가지의 가능한 대응책들을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옹호해야 한다. 이러한 도전의 몇몇 양상들이 실제로 기본소득과 같은 이전급여체계의 전망을 악화시키기보다는 개선시킬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길을 따라서 말이다.11)


결국 ‘자본과 상품, 그리고 사람들의’ “국적을 초월하는 실질적, 잠재적 이주”라는 도전은 기본소득이라는 형태(type)의 이전급여체계의 전망을 악화시키기보다는 개선시킬 세 가지 대응책을 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이다.


그 “세 가지의 가능한 대응책들”이란, 그에 의하면, 하나는 “지구적 기본소득”이고,12) 다음에는 “유로배당금” 같은 “지역적 기본소득”이며,13) 나머지 하나는 “전지구적 경제에서[의] 국가적 기본소득”이다.14) 그런데 그 너저분한 논의를 미주알고주알 추적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가 첫 번째 “가능한 대응책”인 “지구적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만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 대응은 아주 명백하다”며 그는, “만약 국가들이 하나의 지구화된 시장에 대한 그들의 몰입 때문에 재분배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면, 우리로 하여금 재분배를 지구화하도록 만든다”고,15) 문제를 정말 정말 명쾌하게 해결해버린다. 그 명쾌함은 다음과 같이도 표현된다.


이러한 지구화된 재분배가, 복잡하고 미묘하게 조직된 복지국가의 형태를 취한다고는 좀처럼 예상할 수 없다. ... 만약 지구적 기본소득이 실현된다면,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조달되는 아주 단순한 수당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있다.16)


이렇게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조달되는 아주 단순한 수당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아주 명쾌하게 말하는데, 물론 무턱대고 장담만 하거나 당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 서울 선언’이 자신 있게 말하는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방안들도 제시한다. 예컨대 이렇게―


① “네덜란드의 예술가 Pieter Kooistra...가 ... 설립한 재단”이 “선전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바의 “사람들이 축적할 수 없는 임시 통화의 발행을 통해 조달되는 소규모의 조건 없는 소득,”17)

② “좀 더 학문적인 관점에서, 정치 철학자 Thomas Pogge(Yale Univ.)”가 “주장해”온 “지구의 천연자원의 사용과 판매에 대한 세금으로부터 조달되는 ‘지구적인 자원배당금(global natural dividend).’” ― “여기에 깔려 있는 생각은, 우연히 이러한 자원들을 갖게 된 나라의 사람들이 그 자원의 가치를 배타적으로 전유할 타당한 윤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가치의 일부를 통해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기본 욕구를 틀림없이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18)

③ “캐나다 경제학자 Myron Frankman(Mc Gill Univ.)”이 그의 “논문에서” 그 “실현가능성을 주장하는” “전 세계적으로 누진적인 소득세에 의해 조달되는 ‘지구 차원의 시민소득(planet-wide citizen's income)’.”19)

④ “세계의 부유층에 대해 합당한 비용을 부과하는 단순한 수단을 통해 세계의 가난을 실질적으로 완화하려는 관대한 바램이든, 또는 특히 국제적 금융거래에 대한 토빈세(Tobin tax)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이 자신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조세들[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적절히 사용하고 싶은 욕구이든, 많은 다른 학자들도” “제안하게” 된 “마찬가지로 단순한 보편적인 기본소득.”20)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그 얼마나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방안들인가! “그러나” 이것들만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을 따른 생각들 중 가장 유망한 방식은 기후변화 논의의 핵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인류의 주요 취약한 부분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는 기후적 현상들을 관리하지 않으면, 지구의 대기는 탄소배출을 소화하기 위해 제한된 용량을 가진다는 것에 많은 의견일치가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지구적인 자연 문제이기 때문에, 지구적인 행동이 요구된다. 그리고 만약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이러한 집단적 행동을 공정한 협정으로 여길 수 있을 때만, 이러한 지구적인 행동은 적절한 속도와 열의를 갖고 이루어질 것이다. ...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협력적 정의(공공재를 생산하는 비용이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 어떻게 분담되어야 하는가?)라는 측면도 아니고, 보상적 정의(공공적 손해를 이루는 비용들이 그러한 손해를 야기한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분담되어야 하는가?)라는 측면도 아니라, 분배적 정의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분배되기 위한 희소한 자원의 가치가 그에 대해 권리를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 그러므로 “기후 정의”를 결정짓는 최고의 방법은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비록 정확하진 않지만 심각한 손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지구의 탄소 배출이 초과하지 말아야 할 한계점을 결정하라. 둘째,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주어진 기간 동안 이러한 한계점에 달하는 탄소배출량에 대한 배출권을 팔아라. ... 셋째, 대기의 “소화력(digestion power)”을 이용할 평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들 즉 인류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그러한 경매로부터 얻어지는 (막대한) 수입을 분배하라.21)


탄소배출의 한도를 결정하고, 그것을 경매하여 거기에서 얻어진 막대한 수입을 인류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분배하라! ― 참으로 “기후 정의”도 세우고 전 인류의 “기본소득”도 보장하는 가히 혁명적인 일거양득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놓쳐서는 안 될 것 하나! “경매하라. ... 그러한 경매로부터 얻어진 막대한 수입을 분배하라.” ― 그야말로 철저히 사유재산제, 시장경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 그에 기초한 방안, 그리하여(!) 그야말로 ‘기본소득 서울 선언’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방안이다!


자, 그건 그렇고, 이쯤에서 우리의 의문 하나쯤을 제기하더라도 과히 부당하지 않을 것이다. ― 다름 아니라, 그런데 이들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방안들은 도대체 누가 그것을 주관하여 “공허한 망상이 아니라 현실”로 구현한단 말인가?

전 지구적 권력이?

전 지구적 국가가?

전 지구적 또라이들이?

실제로 그는 문제를 전 지구적인 또라이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이상 몽상도 아니다”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이것이 공정한 협정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세계적인 차원의 기본소득은 여전히 아주 가깝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몽상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몇몇의 시행 문제는 해결될 필요가 있다. 인구규모에 대한 각국 정부의 추산에 비례하여 각국 정부에게 수익금을 분배하는22) 것은 유망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는 반발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적절한 정보를 틀리게 보고하며 국민들에게 수익금이 도달하기 전에 수익금의 상당부분을 착복하려는 몇몇 정부와 행정관료들이 있기 때문이다.23) 좀 더 유망한 방안은, 그 수익이 단지 정부가 아니라 개인에게 도달할 것을 보장하는 것과 연계된 초국가적 방식이다. 이것을 좀 더 쉽게 관리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60세 내지 65세 이상의 개인에게만 그러한 보편수당을 한정시키는 방식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24)


역시 “초국가적 방식”을 들고 나오는데, 다른 것은 다 그만 두더라도, 역시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 ― 누가? 초국가적 또라이들이?

“현대적인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해왔”으며, 그리하여 그의 참여 자체가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를 빛내준다는 이의 방안이라는 것이 이처럼 또라이적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본소득이라는 논의 자체가 또라이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공감하”여 “그 가능성과 현실성 또한 충분히 고려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해왔으며,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국가 단위,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기본소득의 실현을 모색하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제도화 노력까지 기울여” “그 소중한 결실 가운데 하나가 지난 2004년 국가 단위로는 세계 최초로 브라질에서 시민기본소득법이 제정된”25) 바, 이 “브라질 시민기본소득법 제정의 주역이[시]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명예 공동의장”이라는 참으로 명예로운 간판을 가지고 역시 “이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방한”하신,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Economics of Escola de Administracao de Empresas e de Economia de Sao Paulo 교수[님]”이시기도 하신 에두아르도 수플리시(Eduardo Matarazzo Suplicy) 브라질 노동당 상원 의원님의 논의


그는 “시민기본소득: 브라질과 한국을 위한 멋진 제안”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 ‘논문’ 속에서 그는 “시민기본소득(The Citizen's Basic Income, CBI)은 각 개인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킬 정도로 충분해야 하며 마을, 지자체, 주, 국가, 나아가 언젠가는 대륙 또는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지급되어야만 한다”26)면서, 친절하게도 “시민기본소득의 이점은 무엇일까”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들에 대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 경제학자, 사상가들”, 그리고 심지어는 “구약성서”ㆍ“신약성서 사도행전”까지 동원하면서 “브라질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기존의 소득이전제도보다 훨씬 쉽게 설명”하고 계시는데,27)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 혹은 백미(百媚)는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우리 헌법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한다. 즉 공장, 농장, 호텔, 식당, 은행, 부동산, 금융 채권 소유자들은 자산수익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수익, 임대료, 이자와 같은 것들이다. 브라질과 한국법이 자산수익을 얻기 위해서 자산 소유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 일을 하고 있다.28) ...

따라서 우리보다 더 많은 재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수익을 얻을 권리를 보장해 준다면, 모두에게 이를 확장시켜 국가의 부에 참여하도록 브라질인으로서의 권리를 주는 것은 어떤가? ... 모든 브라질인이 국가의 부에 참여해서 미약한 소득이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시민의 권리로서 동일한 금액을 받는다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양식있는 제안이다. 이 제안의 기저에는 인류 역사에 대한 통찰이 깔려 있다. 또 모든 종교 및 방대한 스펙트럼의 위대한 철학자, 경제학자, 사상가들에서도 이런 생각은 나타난다.29)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 헌법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한다. 즉 공장, 농장, 호텔, 식당, 은행, 부동산, 금융 채권 소유자들은 자산수익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 ‘기본소득제도’가 혹시 사유재산제의 신성불가침성을 손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일부 몰지각한 의혹을 불식시키는 확실한 보장이다! 다름 아니라,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면서도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보장!


그러니 “이건 양식있는 제안”이며, “이 제안의 기저에는 인류 역사에 대한 통찰이,” “또 모든 종교 및 방대한 스펙트럼의 위대한 철학자, 경제학자, 사상가들”의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면을 아끼기 위해 너저분한 논의ㆍ말씀들은 다 건너뛰고, 그가 ‘논문’의 제목에서 한껏 독자들의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그의 “브라질과 한국을 위한 멋진 제안”을 들어보자.

그는 말한다.


나는 2007년 나는[원문대로!] 한국을 방문해 국회의원 및 외교통상부, 국립정치경제학연구소(the national Institute of Political Economics)를 방문한 바 있다. 당시 나는 두 가지 제안을 한 바 있는데, 이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다.30) 남한과 북한의 화해와 통일31)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두 개의 단계가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단계는 남북 혼합 축구팀과 브라질 국가대표팀 사이에 두 차례의 축구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브라질 축구팀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축구팀이자 2002년 월드컵 우승팀이기도 하다. 한 번의 경기는 평양에서 또 다른 한 번은 서울에서 이루어지면 좋겠다. 최고의 브라질 선수들은 브라질 대표팀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혼합팀 간의 게임이 있다면 참가할 의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열릴 이 같은 행사에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32)


아니? 나는 교수이시고 박사이시기도 하신 노동당 상원 의원님께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몸소 “방한”하신 줄 알았더니, 축구 흥행사로 방한하셨나?

그러나 아무튼 얼마나 “멋진 제안”, “멋진 제안”인가?!

그리고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좀 더 들어보자.


둘째 단계는 남북한 각각33) 4천 9백만, 2천 3백만 시민들을 위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대단히 훌륭한 사례를 만드는 것이라고 확신한다.34)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누가 “시민들을 위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제도화”한다? ― 물론 정부 혹은 국가가 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북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처지가 못 되고) 남쪽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하자면, 상원 의원님께서 손수 “국회의원 및 외교통상부, 국립정치경제학연구소” 나리님들을 만나 “멋진 제안”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건만 그 정부 혹은 국가가 “시민들을 위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제도화”하는 데는 눈곱 만큼의 관심도 없고 ‘4대강 살리기’(?)니, ‘뉴타운 개발’이니 하는 등의 떼돈벌이되는 토목사업에만 매진하고 있으니, 이 딱한 노릇을 어쩐다? ― 혹시 그렇게 번 떼돈을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재원ㆍ기금으로 삼으려는 심산인가?


한국이야 그렇다 치고, 브라질에서는 상원의원님의 주도로 일찍이 2004년에 시민기본소득법이 제정되었다니, 즉 저들 기본소득론자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제도가 제도화되었다니, 브라질에 어떤 “글로벌 시대의 지속가능한 유토피아”가 실현될지 심히 기대된다.


(3) 이수봉 민주노총 대변인의 논의


이수봉 민주노총 대변인의 “기본소득의 보편성과 운동적 의미: 노동과 복지의 행복한 만남을 위하여”라는 ‘논문’은 3일간에 걸친 ‘국제학술대회’의 첫 번째 발표문이고, ‘대회’의 <<자료집>>에도 당연히 제일 앞자리에 게재되어 있다. 이는 민주노총 대변인인 그의 발언으로부터 ‘대회’가 실질적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동시에, 그에 앞선 발언들, 그러니까 개회사나 축사 같은 것들이야 극히 의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와 그의 발언이야말로 이번 ‘대회’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와 그의 발언이 이렇게 최고의 예우를 받은 것은, 개인 이수봉 씨에게는 실례되는 발언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의 ‘학술적’ 역량의 특출함 때문도, 그의 발표문 내용의 특출함 때문도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그런 예우를 받은 것은, ‘기본소득’ 논의가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포섭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그가 민주노총의 주요 간부, 그것도 마치 민주노총의 모종의 입장을 암암리에 대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대변인이라는 직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 화려한 ‘기본소득’ 논의 소동을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바로 그것이 그렇게 노동자계급을 포섭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봉 민주노총 대변인의 이번 발표문이 “2009년 2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책자가 나온 이후 ...”35) 운운하면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이 ‘대회’ 혹은 한국에서의 ‘기본소득’ 논의 자체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대회’ 조직자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에 정말 훌륭히 부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책자가 나온 이후” 제기된 “비현실적 급진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36) “기본소득론자들은 일정한 반비판을 통해 나름대로 방어책을 제시해왔”으며, “몇 가지 난제들에 대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거의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며,37) 그는 다음과 같이 무척 전투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분명히 해명되었다고 생각되는 설명들은 여전히 거부되고 있으며 침묵의 카르텔에 직면해 있다.

나는 이런 현상들이 지금 진보진영의 무기력을 초래하고 있는 원인들과 같은 뿌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판단한다. ...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으며 사회적 문제는 커져가고 있는데 왜 강력한 대중운동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

단언컨대 이것은 이중의 질곡에 대중들이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로 대표되는 보수집단은 대중들을 탄압하지만 진보진영은 대중들을 대변하는 척 하면서 발목을 잡고 있다.38)


그는 이렇게도 주장한다.


무엇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가? 무엇이 대중들이 급진적으로 진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그것은 경찰의 방호벽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

... 이명박 정권으로 상징되는 보수의 벽, 의식영역에서 저지선을 치고 있는 보수언론의 벽, 경찰을 포함한 물리력의 벽은 이중장벽 하에 보호받고 있다. 그것은 통상 알려지듯이 대중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개혁진영의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이다. 즉 ... 보수와 진보개혁 對 대중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 기본소득 같은 담론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 두터운 벽 즉 보수와 진보개혁세력간의 공모가 어떤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는가를 분명히 드러내고 해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39)


그가, 보수세력과 공모하여 대중의 발목을 붙잡고 있고 짓누르고 있다고까지 적대하고 있는 “진보진영” 혹은 “진보개혁세력”이란, 문맥상 명백히 자신들의 ‘기본소득’ 주장에 반대하는 진보진영이다.

그런데 그가 “이명박 정권으로 상징되는 보수의 벽, 의식영역에서 저지선을 치고 있는 보수언론의 벽, 경찰을 포함한 물리력의 벽”을 보호하고 있는 “이중장벽”으로 지목하고 있는 “진보개혁진영의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맑스가 맑스주의화 하면서 결정적인 한계는 ‘과학주의’로 나타난다. 이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을 것이다. 과학임을 주장하는 자본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 역시 과학이라는 포장이 필수적이었다. 물론 진보적 담론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통용되는 논리와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외에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결국 그 결과로 맑스가 넘어서려고 했던 탈근대적 문제의식이 다시 근대성의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된다.

그 프레임이란 오늘날 흔히 한계로 지적되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다. 첫째 임노동자 내지 프롤레타리아의 변혁능력을 특권화한 맑스의 변혁주체론이다. 둘째 노동가치설의 주창자로서의 맑스주의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근대적 담론 속에 포획되면서 발생하는 이론적 통속화의 결과이다.40)


이 혼란된 논의가 명확히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명박 정권으로 상징되는 보수의 벽, 의식영역에서 저지선을 치고 있는 보수언론의 벽, 경찰을 포함한 물리력의 벽”을 보호하고 있는 “이중장벽”으로서의 “진보개혁진영의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란 바로 맑스주의라는 것이다. “임노동자 내지 프롤레타리아의 변혁능력을 특권화” 하고, 노동가치론에 기초한 맑스주의야말로 바로 그러한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이며, 그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그러한 낡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는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민주노총 대변인의 주장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이 낡고 반동적인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가?

그는 자신이 논의에 “본격적으로 들어” 간다고 하는 부분을 다음과 같은 염불로 시작한다.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時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하나 가운데 일체 있고 많은 가운데 하나 있는지라,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일세.

하나의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일체의 티끌 무더기도 또한 이와 같네.

영겁의 시간이 곧 한순간이요, 한순간이 곧 영겁의 시간이라.41)


의상의 「법성계」란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왠 한시인가 하겠지만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즉 티끌하나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불교적 성찰은 기본소득의 철학적 기초를 잘 설명해준다”42)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과학도, ‘과학주의’도, 맑스와 맑스주의도 거부하고 사실상 매도하면서, 해탈성불(解脫成佛)의 논법과 동서고금을 망라한 성현ㆍ철학자들과 신진 과학자들의 ‘심오한 사상과 발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의 주장에 대한 어떤 비판도, 예컨대,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노동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43)라는, ‘과학주의’를 넘어선 참으로 어이없는 설법에 대한 비판도 그의 관점에서는 분명 “지적 게으름이 낳은 치명적 결과”44)일 수밖에 없다. 그저 아연(啞然)할 따름이다.


그는 또한 자신들의 ‘기본소득’ 구상이야말로 발본적인 사회개혁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한다.


‘고용보험’과 ‘실업부조’... [같은] 제도들은 ... 질서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 오히려 고용보험과 실업부조는 ... 질서유지의 핵심적 이데올로기 즉 ‘노동윤리’를 강화시키는 촉매작용을 한다.

‘백화점 질서’는 자신의 질서를 강제적으로 강요할 필요가 없다. ... 이것이 오늘날 현대자본주의의 유지 매카니즘이다. 고용보험과 실업부조는 이러한 유지 매카니즘의 한 축으로 작동한다.45)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속담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왜 자신이 주장하는 ‘기본소득’ 역시 고용보험이나 실업부조와 마찬가지로 “현대자본주의의 유지 매카니즘”이라는 사실을, ‘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사실상 모든 논자들도, 또 ‘기본소득 서울 선언’도, 물론 환상적ㆍ몽상적이지만, 어떤 이는 노골적ㆍ적극적으로, 어떤 이는 은밀히ㆍ조심스럽게, 모두 그것이 그렇게 작동할 것으로 전제하고, 그렇게 작용하게 하기 위해서 ‘기본소득’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못보고 있는 것일까, 보고도 짐짓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들의 몽상적 주장을 실현하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한다. 즉, “얼마 전 교수노조에서도 채택했지만 모든 사회운동단체들에서 강령적 요구로 기본소득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면 사회의 변화는 훨씬 더 빨라질 것”이라고.


도대체 누구에게 요구한단 말인가?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전체를 일별해도 그들의 논의대로라면, “국가에게”, 그것도 “현존의 부르주아 국가에게”라는 대답밖에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부르주아 국가의 직분과 역할은 착취와 억압의 부르주아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 결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보장”하여 “지속 가능한 유토피아”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이수봉 대변인이 “‘합리성’ ‘온건성’ 콤플렉스는 어떻게 민주노총을 무력화시켰나”라든가, “노동윤리는 어떻게 노동자를 속박하는가,” “‘건전한’ 노동운동의 치명적 결과,” “참을 수 없는 ‘온건한’ 정책의 한가로움”이라는 소제목 속에서 논하고 있는 내용의 상당 부분에 동의하고 지지한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살리기 위해서 치열한 내부투쟁을 전개할 것을 기대해본다.


(4)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님의 “한국 사회와 기본소득제, 과도 전략의 모색” 논의


그는 역시 불세출의 사상가, 평론가, 시류에 민감한 진보정당의 실천적 전략가ㆍ연구기획실장으로서의 그에게 걸맞은 기대를 결코 배반하지 않고,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자료집 I>>에 실린, 혁명적 언사로 화려하게 장식된 그의 발표문 제목은 “한국 사회와 기본소득제, 과도 전략의 모색”인데, 그 전반부는 “기본소득은 21세기 보통선거권―[기본소득제 과도전략①] 전지구적 민주주의혁명의 재개”라는 제목으로 ‘대회’ 개막 수일 전에 인터넷에도46) 공개되었다.


여기에서 우선 ‘기본소득 서울 선언’이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세계사적 과제로 기본소득 쟁취를 들고 나온 사람들” 운운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름 아니라 이는 바로 이번의 이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혹은 ‘기본소득 서울 선언’에서의 장석준 연구기획실장님의 무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의 홈페이지에는 “선언문은 최광은[사회당 대표]이 초안을 작성했으며 곽노완, 금민, 양의모, 이수봉, 장석준, 전원배, 조정환이 함께 검토”47)했다고 공지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선언문’의 예컨대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 운운과 인터넷에 공개된 장석준 연구기획실장님의 논문 제목상의 “... 과도 전략” 운운이 그 표현 내용에서도 발상에서도 일맥상통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음에 상도한다면, 그의 역할과 비중은 “초안을 ... 함께 검토”한 것 이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기만적ㆍ사기적 담론 전개 수법과 더불어 이 또한 우리가 장석준 연구기획실장님의 ‘논문’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장석준 연구기획실장님의 ‘논문’의 앞부분만을 읽는다면, 무언가 근본적 변화가 임박했고, 또 그리하여 근본적 변혁을 지향해야 할 것 같은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시작으로, 지난 30여 년간 전 지구를 호령하던 초국적 금융 주도 자본주의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한 세대 넘게 인류의 유일한 교과서 역할을 하던 신자유주의 교리들이 이제는 모두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과는 다른 대안을 제출하지 못한다면, 지구 자본주의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도대체 그런 대안이 존재할까? 답은 부정적이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작동하기 힘들지만, 케인스주의로 돌아가는 것도 답이 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원동력인 지구화ㆍ금융화된 거대 자본의 힘은 지난 30여 년 동안 더욱더 강대해졌다. 과거 일국 케인스주의의 낡은 레코드판을 다시 트는 것만으로는 이들의 고삐 풀린 힘을 제어할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런데 제3의 선택지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지구 자본주의는 분명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48)


이런 때일수록 현존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선 근본 대안을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기나긴 혼돈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실현]냐 야만이냐’는 선택을 현안으로 만들 것이다. 현 체제를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든가, 아니면 지금보다도 못한 퇴보와 절멸로 향하든가. 20세기의 경험이 말해주듯, 전자를 실현하려는 힘이 강력하지 못하다면, 역사는 반드시 후자의 방향으로 흐르고 말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현 체제를 뛰어넘는 이상과 이에 바탕을 둔 거대한 운동들이 성장해야만 한다.49)


위 인용문들, 특히 이 인용자가 강조한 문장들을 보라. “사회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실현],” “현 체제를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상,” “현 체제를 뛰어넘는 이상”을 향한 혁명의 혜안이 빛나고, “이에 바탕을 둔 거대한 운동들”을 “성장”시키려는 혁명적 열정이 이글거리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사회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실현]” 운운하며 이미 ‘정답’을 내어놓은 마당에, 바로 이어서 “그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근본 이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이 무언가 심히 수상하다.

그리고 역시(!) 그답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다. 사회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장하여 이에 따라 현존 자본주의의 근본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이다.50)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근본 이상”은 “사회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실현]”도, “현 체제를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상”도, “현 체제를 뛰어넘는 이상”도 아니고,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이며, “사회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장하여 ... 현존 자본주의의 근본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 즉 자본주의를 개선하여 영속시키는 것이란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들여다볼 필요도 없고, 그의 과도 전략이란 “근본 구조를 바”꾼(?) 자본주의로서의 “기본소득제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 전략”51)이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스스로도 그렇게 확인하고 있다.


그의 문필상의 전력 때문에 품었던 기대를 결코 배반하지 않는 문필상의 전형적인 기만과 사기, 이번 ‘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기만과 사기이다. 혁명적 어휘를 화려하게 구사하여 독자들의 관심ㆍ영혼을 사로잡아 독점자본가계급의 황금신 재단에 바치려는 사악한 소부르주아의 흉물스런 기만과 사기이다.


(5) 진보언론들에 그야말로 대문짝만한 인터뷰 기사가 실리는 등 ‘기본소득 국제학술회의’를 맞아 가장 각광받고 가장 바빴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ㆍ‘진보적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의 곽노완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 겸 서울시립대 인문학연구소 교수의 논의


“글로컬 아고라와 기본소득: 지구ㆍ국민국가ㆍ도시ㆍ지방 공동체의 기본소득”이라는 제목의 가히 ‘첨단’ ‘논문’을 ‘대회’에서 발표하고 있는데, 그 서두에서 약간을 인용해보자. “1. 들어가기: 지구화시대의 도시와 공동체”라는 소제목 하에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이어진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도시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Lefebvre)는 1974년 「공간의 생산 The Production of Space」에서 ‘사회적 공간을 개념화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공간은 인간들에게 주어지기 이전에 활동과 생산의 결과물이다(...). 이후 하비 등 마르크스주의 도시론(Marxian urbanism)의 주창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학자들은, 사람이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공간을 ‘사회적 공간’으로 개념화해 왔다. 특히 사람들이 도시로 집중됨에 따라 도시는 지구화시대에 사회적 공간의 대표적인 허브로 간주되어 왔다.

생산 개념을 통해 르페브르는 관찰 가능한 외양의 물신주의(fetishism)을 넘어서서 내적인 동학을 총체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공간의 생산’은, 구체적이며 차별적인 생성적 공간을 부정하고 부르주아적인 화폐의 전일적인 공간으로 전화시키는 자본주의적인 추상적 공간을 탈신비화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생성적’이란, ‘활동(능동)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서 과정을 의미한다. 이처럼 공간의 생성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으로 공간이 어떻게 활동(능동)적으로 생산되었는가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공간의 생산은 상품의 생산에 간주된다. 이러한 르페브르의 견해는 카스텔(Castells)의 견해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스텔에게 도시 문제는 재생산의 문제이다. ... 이는 알튀세르(Althusser)의 영향이 엿보이는 부분 ....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적 공간의 전환(diversion) 내지 재전유(reappropriation)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해방과 향유(pleasure)의 새로운 공간을 생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목표....

메리필드(Merrifield)의 ... 하비(Harvey)의 ...52)


위 인용문 중에도 다섯 명의 ‘세계적 석학들’의 존명이 거론되고, 다음으로 나아가면 다시 불과 몇 페이지 속에 또다시 Balibar, Mitchell, Habermas, Tajbakhsh, Van Parijs, Negri, Hardt, Jessop, Sassen, L"ow, Davis ... 등등등, 정신 차리기 어렵게 열거되는데, 좋다. 곽노완 교수의 한없이 넓고 넓은 박식함의 표현이라고 하자.


그런데 위 인용문 중의, 예컨대, “사회적 공간은 인간들에게 주어지기 이전에 활동과 생산의 결과물이다”라니? 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생산 개념을 통해 르페브르는 관찰 가능한 외양의 물신주의(fetishism)을 넘어서서 내적인 동학을 총체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니? 이 또한 도대체 무슨 뜻일까? 도대체 무엇의 “관찰 가능한 외양”이고, 무엇의 “내적인 동학”이란 말인가? “‘공간의 생산’은, 구체적이며 차별적인 생성적 공간을 부정하고 부르주아적인 화폐의 전일적인 공간으로 전화시키는 자본주의적인 추상적 공간을 탈신비화하고자 하는 개념”이라니? 이것은 도대체 또 무슨 뜻일까?


또 몇 페이지를 넘기면, 예컨대, “불평등한 기본자산의 압도적인 부분을 자본ㆍ화폐 및 증권ㆍ부동산 등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의 원천이 되는 자산보다는, ... 선망 받는 직업(job) 내지 정규직으로 봄으로써 이러한 직업이 낳는 고용지대(employment rent)(Van Parijs, ...)에 대한 중과세를 통한 기본소득의 대부분의 재원을 마련하자는 제안” 운운하고 있는 바, “고용지대(employment rent)”라니? 그것도 맑스주의 학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도대체 합리적ㆍ과학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용어인가?53)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면서 비단옷을 걸쳤다고 떠들어대는 지식인들의 세태! 아무리 그렇게 ‘광인(狂人)의 언어’(Unsinn)로 가득 찬 세태라지만,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고 외칠 사람이 진정 아무도 없단 말인가?!

아무튼 이렇게 싹수부터 노라니, 그의 논의는 더 이상 톺아볼 필요가 없다.


(6) 기타 발표자들의 논의


최광은 사회당 대표, 안현호 대구대 교수, 백승호 가톨릭대 교수, 강남훈 한신대 교수, 양의모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객원연구원, 금민 사회대안포럼 운영위원장 등등은 논자에 따라 그 색조를 다소 달리하면서도 그 소부르주아지성을, 즉 자신들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솔직하고 대체로 차분하게 드러내면서 논의를 짜임새 있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한에서 이들의 논의는 그 내용과 계급성, 그리고 완성도 높은 짜임새라는 면에서 이번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를 실질적으로 담보하고 있는데,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삼 이렇다 하게 논의할 가치나 특색은 거의 없다.


IV

‘대회’에 즈음하여 발표한 ‘기본소득 서울 선언’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은 자신들이 “기본소득을,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하고 있으며, 그 “필요성과 정당성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과 현실성 또한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저들 모두는,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니, “사회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실현]”이니, “현 체제를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니, “현 체제를 뛰어넘는 이상”이니 하는 따위의, 그야말로 자신들의 본심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적 허사(虛辭)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폐지하려는 어떤 방안이나, 하다못해 당위성ㆍ필요성조차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온존시키려 하고 있고, 그를 위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온존시키고도 노동자들이나 노동자단체, 사회운동단체들이 ‘기본소득’을 이해하고 강령적으로 채택하기만 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온존시키고도 누구에게나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 보장될 것 같은 환상을 유포하려고 하고 있다. 결국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기본소득’의 보장은 생산관계의 변혁과는 무관한 분배관계의 변혁의 문제인 것이다.


이수봉 민주노총 대변인의 글에서 본 것처럼 과학 및 ‘과학주의’와 더불어 맑스와 맑스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고 그리하여 반동적으로까지 된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로 거부ㆍ매도되고 있고, 적잖은 수의 천재들, 곧 대반동기의 자식들이 “맑스를 넘어선 맑스”를 자처하고 있지만, 나의 비판은 역시 맑스와 맑스주의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인용하건대, 맑스는 예컨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소란을 떨고 그것에 역점을 두는 것은 대체로 오류였다.

어떤 시대에나 소비수단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산조건의 분배는 생산양식 자체의 한 특징이다.54)


속류사회주의(그리고 그를 본받아 민주주의자의 일부)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부터, 분배를 생산양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고찰하고, 취급하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주로 분배를 중심으로 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방식을 이어받고 있다.55)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 그것이 특수한 종류(Art)의, 특정한 역사적 규정성을 지닌 한 생산양식이라는 것, 다른 모든 특정한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떤 주어진 단계의 역사적 생산력과 그 발전형태를 그 역사적 조건으로서 전제하는데 그 조건이란 그 자체가 선행한 과정의 역사적 성과이고 산물이며 거기에서 그것을 주어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생산양식이 나온다고 하는 것, 이러한 특정한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산양식에 대응하는 생산관계― 인간이 그들의 사회적인 생활과정 속에서, 그 사회적 생활을 생산하면서 들어가는 관계 ―는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인, 그리고 경과적인(vor"ubergehenden)성격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배관계는 이 생산관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그 뒷면이고, 그리하여 양자는 동일한, 역사적으로 경과적인 성격을 공유한다는 것을 입증한다.56)


그리고 엥겔스도 이렇게 얘기한다.


[뒤링이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전적으로 좋아서 지속될 수 있지만, 자본주의적 분배양식은 쓸데없는 것이며 폐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데에 대해서: 인용자] 생산과 분배의 관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경제학에 대해서 쓰면 이러한 정신 나간 소리(Unsinn)를 하게 된다.57)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58) 뒤링의 경제학은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전적으로 좋고 계속 존속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적 분배양식은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로 귀착된다. 이제 우리는 뒤링 씨의 ‘공정사회’(Sozialit"at)란 이 명제를 공상(Phantasie) 속에서 실행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사실상 명백해진 것은 뒤링 씨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양식―본래의 의미에서의―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낡은 분업을 모든 본질적인 면에서 유지하려고 하며, 따라서 또한 그의 경제적 코뮌 내부의 생산에 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생산은 물론 단단한 사실들이 다루어지는 영역이며, 따라서 수치(羞恥)를 안길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합리적인 공상’이 그 자유로운 영혼을 날개 치게 할 여지를 단지 조금만 주는 영역이다. 그에 반해서 분배는, 뒤링 씨의 견해에 의하면, 생산과는 물론 전혀 관련이 없으며, 그것은 그에 따르면 생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의지행위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 분배야말로 그의 '사회적 연금술'을 위해 숙명적으로 예정된 영역이다.59)


이들 인용문들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부연설명도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서 명확하다. 그리고 특히 엥겔스로부터의 마지막 인용문은 ‘뒤링 씨’를 ‘기본소득론자들’로, “‘공정사회’(Sozialit"at)”를 ‘기본소득’으로 바꾸어 읽는다면, 그야말로 정확히 ‘기본소득’을 설교하는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물론 상당 정도의 사회보장제도가 작동하고 있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체제를, 즉 이른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 사회는 분명 자본주의 체제이지만 우리 사회는 물론 자본주의 세계의 다른 대부분의 국가사회보다도 훨씬 더 ‘기본적 복지’가 보장되어 있는 체제이다. 여기에서도 저들 소위 기본소득론자들은 자신들 주장의 잠재적 현실성, 그 실현 가능성을 강변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 “보라,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전제한다고 해서 ‘기본적 복지’의 보장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그보다 불과 몇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서유럽과 북유럽의 저 소위 사회민주의의 체제는 과연, 저들이 암묵 중에 상정하는 것처럼, 탁상의 산물로서 그것을 획득하려는 운동 속에서, 그러한 운동의 성과로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던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분명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이며, 노동자들이 그렇게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점자본가계급이 어쩔 수 없이 후퇴한 결과일 뿐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리고 특히, 1930년대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반적 위기와는 정반대로 승승장구했고, 제2차 대전기에는 나찌 독일의 침략과 파괴ㆍ살육에 대항하여 2000만 명 이상의 희생을 치르는 대전쟁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성장ㆍ발전하던 사회주의 쏘련을 보면서,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 진출을 자극한 사회주의 쏘련의 존재와 그 발전이야말로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형성되게 된 원인이자 배경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노동자계급의 성형과 발전, 그리고 그 정치적 운동의 역사가 길고 쏘련에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었던 유럽에서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튼튼하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나아가 이 점은 또한 이후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하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자본주의 선진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은 그 사회보장제도에 안주하고 매달리며 그 혁명성, 전투성을 상실해갔다. 쏘련은 수정주의로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이들 조건에 힘입어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기구는 쏘련을 악의 제국으로 낙인찍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저들 사민주의적 사회보장은 답보하고 약화되기 시작했다. 노동자계급이 혁명성을 상실하고 사민주의적 사회보장제도에 안주하여 그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쏘련이 후루쇼프 이래 수정주의의 득세로 그 사회주의가 약화되면 약화될수록, 그리고 그러한 조건 속에서 독점자본의 그리고 ‘좌익’ 반쏘분자들의 반쏘 악선전이 대중을 포획하면서 쏘련이 악의 제국으로 낙인찍히면 찍힐수록, 저 사민주의적 사회보장제도는 약화ㆍ해체되어 갔던 것이다. 물론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 그 약화ㆍ해체는 속도를 더해왔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저들 소위 기본소득론자들은 저간의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거나, 어렴풋이 알면서도 그 불치의 반동성 때문에 이를 결코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본소득’이라는 또 하나의 몽상, 또 하나의 몽상적인 사민주의 정책ㆍ운동으로 독점자본 지배의 이 대반동의 시대를 역전시킬 수도 있다는 듯이 노동자 대중을 기만하면서, 그들을 독점자본의 재단에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다.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여, 제발 사기 좀 작작 처라!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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