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회 맑스 코뮤날레’를 소재로 한 기획 글은 총 3편입니다. 다음 글은 26일 밤, 혹은 27일 오전 중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담론은 담론일 뿐 정치가 아니다. 때문에 정치를 담론으로 행하는 좌파가 현실정치에서 도태되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지난 10여 년을 돌이켜보면 세계 코뮨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추출된 사회주의, 탈근대, 외부성 등등 한국 좌파 사회에서 담론은 많았으나 그 중에서 일부분이라도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한 것은 별로 없다.
물론 담론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좌파의 담론이 정치가 되지 못한 것은 담론을 정치세력화 할 적당한 힘을 만나지 못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또한 그것이 속 편한 설명 방식일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지난 10년 간 정치세력화한 주체가 좌파의 독자적인 담론을 현실정치에서 구성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책임은 오로지 지난 10년 동안 무능했던 정치세력들의 몫인가? 허공을 붕붕 떠다니는 담론들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현실과 조우하지 못한 것에는 한국 좌파 지식인들의 책임도 크다. 좌파가 담론 그 자체를 정치로 이해하는 한, 또 담론만으로 정치를 구성하려고 하는 한 담론은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다. 담론을 손에 쥔 사람이 정치세력화의 문제, 즉 담론에 대한 대중의 동의 문제를 외면하는 한 담론은 그저 담론으로 존재할 뿐이다.
한편 정치세력화 한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그와 같은 와중에 보수의 담론에 갇혀 보수 2중대라는 평가를 듣는 사태를 초래하거나 혹은 스스로 낡은 버전의 민주주의에 갇히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현재 한국의 진보는 이제는 넘어서야 할 87년 체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포스트 87년 체제 정치전선을 구성해야 할 상황”
이와 같은 반성의 측면에서 볼 때 제4회 맑스 코뮤날레가 주제를 ‘맑스주의와 정치’로 설정한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서울시립대에서 25일과 26일에 진행된 4회 맑스 코뮤날레는 ‘맑스주의와 정치’라는 큰 주제를 설정하고 ‘대중정치’, ‘국가와 정치’, ‘맑스주의 역사와 정치’, ‘노동의 정치, 삶의 정치’라는 4개의 구체적인 주제에 대해 한국 맑스주의 지식인들이 각각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맑스 또는 좌파이론에 대한 연구를 공통분모로 하는 한국의 학자 및 논객들이 모이는 맑스 코뮤날레에서 ‘정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맑스주의 또는 급진좌파의 정치세력화 의지로 이해될 수도 있다. 4회 맑스 코뮤날레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토론회의 주제가 ‘공황, 계급투쟁, 좌파의 정치’라는 것도 좌파이론의 절박한 정치적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됐다. 지금까지 한국의 맑스주의가, 좌파 지식인 사회의 상당 부분이, 그저 정치 담론을 이야기할 뿐 살아있는 대안정치를 구성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일단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지금은 ‘한국 현실정치에서 집권 가능한 새로운 대안 형성’이 진보개혁세력의 주된 담론인 시대가 아닌가? 4회 맑스 코뮤날레에 참석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균열되고 해체된 87년 체제적 정치전선을 대체할 포스트 87년 체제적 정치전선을 구성해야 할 상황에 와 있는 것”이다.
또 강내희 제4회 맑스 코뮤날레 집행위원장이 초대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오늘날 맑스의 현재성을 주장해야 할 필요를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자본주의를 지탱해오던 신자유주의 전략이 지금 무너지고 있으나 신자유주의가 쫓겨나가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자본주의 전략이 들어서려는 조짐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주의 또는 급진좌파의 정치는 절박한 문제다.
제4회 맑스 코뮤날레 ‘맑스주의와 정치’에 정치는 부족했다
그런데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진행된 제4회 맑스 코뮤날레 전체 토론 일정의 대부분에 그저 시론적인 형태의 정치 담론이 있었을 뿐, 포스트 87년 체제를 규정하거나 신자유주의 이후를 구성할 정치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맑스주의자로 행세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담론 구성 이상으로 정치를 끌어 올릴 기획에 대한 무능 혹은 소박함에 스스로 만족하거나, 혹은 현실적 세력을 형성할 기획 없는 담론만을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현실과 철저하게 분리된 이데아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 촛불의 현장에서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외치는 상황에서 주권의 정치학을 정치신학이라고 비판하고 “주권의 관념을 넘어선 정치의 상상”(조원광,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4회 맑스 코뮤날레 자료집에 실린 ‘주권의 정치학을 넘어서: 정치신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글 중에서)을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기획을 가진 정치가 아니다. 이런 주장이 현실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주권의 관념을 넘어서는 그 상상의 내용을 밝히고 그것의 작동에 대해 현실적 상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는 실현됨으로써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해야 할 텐데, 조원광의 글은 오로지 비판에만 머물 뿐이다.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강한 통합력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좌파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까지 민족주의를 내재화하고 있다”(배성인, 한신대 정치학과 교수, 제4회 맑스 코뮤날레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국민국가의 문제’ 발제 중에서)라고 성토하는 것도 민족주의 극복방식에 대한 기획이 없다면 현실정치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민족주의를 내재한 국민 일반을 성토하는 방식으로는 민족주의의 강한 통합력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기획을 이끌어낼 수 없다.
국민국가를 넘어선 대안적 지구화 운동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도 촛불은 국민국가 차원에서의 대중의 역능을 보여줬다.
“정치의 영역을 국가의 영역에서 떼어내야 한다…국가라는 영토를 허물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물리력으로 규정하는 국가를 상정하고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야 한다”(임동근, 문화과학, 제4회 맑스 코뮤날레, ‘자본과 국가: 국가는 자본의 상부구조인가’ 발제 중에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근대 국가 체제에서 주권 권력이 발동하는 현실정치 세계에서는 공허한 주장이다. 국가를 넘어서는 기획은 현실국가장치에 대한 분석과 대항정치 기획 없이 공론에 불과할 수 있다. 유토피아는 현실적일 때에만 그 유토피아적 힘을 가장 크게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하는 지식인
한국의 맑스주의, 혹은 좌파 지식인들은 1997년 이후 미완의 정당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 정치세력의 근대성, 민족주의, 국가주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반면 정치세력들은 현실에 참여하지 않는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한국 지식인의 입장을 대신해 변명하자면 글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혹은 참여했으나 그 성과가 미미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담론을 정치세력화 할 적당한 힘을 만나지 못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안담론을 대안정치로 구성하는 것은 단지 활동가나 실천가들의 몫으로 돌릴 일이 아니며 담론을 현실화 할 기획을 제출해야 할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제4회 맑스 코뮤날레에서 한국 맑스주의 지식인들이 정치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거론한 것 자체는 아무튼 성과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맑스 코뮤날레 조직위원회가 ‘맑스주의와 정치’라는 주제를 가지고 4회 맑스 코뮤날레를 진행한 것은 시의 적절했다. 맑스 코뮤날레 전체 일정 속에서 ‘맑스주의와 정치’라는 주제에 충실한, 한국 진보의 현실정치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토론도 없지 않았다. 이런 내용은 이어지는 글에서 보충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