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노동 무임금? 일 안해도 월급 준다면…"
[4대강 대신 사회안전망을·끝] '기본소득제' 주장하는 이수봉 민주노총 홍보미디어실장
기사입력 2009-09-02 오전 8:54:31
복지는 일종의 '보험'이다. 출산이나 실업, 노령화나 사고를 통한 피해 등의 돌출적 변수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사회적 보험이다. 당연히 위기의 시기에 그 중요성이 유독 강조된다. 그리고는 또 쉽게 잊는다. 여기에는 '나는 일자리를 잃지 않을거야'와 같은 일종의 기대 심리도 작동한다. 위기를 대비하는 복지를, 남의 일로 여기기 쉬운 것이다.
만일, 일하지 않아도 국가가 매달 일정액의 월급을 주는 복지라면 어떨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취직을 했든 하지 않았든, 최소한의 소득을 받게 된다면? 이런 발상은 위기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의 '복지제도'와는 다르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다. 동시에 이는 일하는 이들에게만 월급을 주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혁명적 문제제기다.
"어떤 노동도, 어떤 심사도, 어떤 의무도 없이 국가가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제도는 아직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뜨거운 이슈다. 부분적으로 이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인 브라질은 2010년부터 전 국민에게 이 제도를 도입한다. 독일에서는 경영학자이자 자본가인 베르너가 직접 나서 기본소득제 도입에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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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분적으로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인 브라질은 2010년부터 전 국민에게 이 제도를 도입한다. ⓒ프레시안 | 국내에서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올해 초 이와 관련된 책을 출간되면서 사실상 처음 화제가 됐다. 모든 국민에게 국가가 월급을 주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지난달 27일 이 책의 공동 저자 세명 가운데 한 사람인 이수봉 민주노총 홍보미디어실장(전 정책연구원장)을 만나 기본소득제의 구체적 내용과 의미, 가능성에 대해 들었다.
이수봉 실장은 "기존의 복지체제는 성장과 고용의 비례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잔여적 의미가 컸다"고 말했다. 고용을 전제로 한, 보완적 의미의 복지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복지 제도가 각종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덮어주고 시스템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 측면도 있다는 얘기였다.
지금의 문제는 그런 복지의 전제가 되는 '고용' 자체가 불안해졌다는 데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지적은 다시 말해 "노동과 소득이 분리돼 가고 있는" 현실의 또 다른 표현이다. 기본소득제는 이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100명 가운데 50명은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지만, 일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일이 가능할까? 이들의 주장은 "그렇다"이다.
물 론 가만히 앉아서는 안 된다. 이수봉 실장은 "기본소득은 그 자체,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 세재 개혁과 쌍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기에, 기본소득제는 "정책이 아니라 담론이자 일종의 깃발"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국가경제 성장에도 반드시 기여한다"고 이 원장은 힘주어 말했다.
국내에서는 이제 걸음마 단계에 있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 사회안전망에 대한 고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다음은 이날 진행된 인터뷰 전문이다.
"어떤 심사도 어떤 의무도 어떤 노동도 없이 월급을 지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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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와 노동의 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라고 얘기하는 이수봉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 ⓒ프레시안 | 프레시안 : 기본소득제도는 우리 사회에서 낯선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이수봉 : 심사와 노동의 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쉽게 말해 일자리를 잃었거나, 취직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국가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다. 어떤 심사나 의무도 수반되지 않는다. 이런 얘기가 다소 생경하거나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절망에 빠져 있는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얘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연령대 별로 일하지 않더라도 임금을 주는 것이다. 지난 2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민주노총 펴냄, 강남훈·곽노완·이수봉 지음)를 발간할 당시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낸 모델이 있다. 0~39세는 1인당 연 400만 원, 40~54세는 연 600만 원, 55~64세는 연 800만 원, 65세 이상은 연 900만 원을 지급하는 것이다. 연간 290조의 예산이면 가능한 일이다.
기본소득제가 모든 사회복지제도를 대체하는 개념은 아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는 전제다. 또 장애인 보조금 등과 같은 복지제도는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제도를 고민하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외환위기 시절 경제위기 속에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복지체제를 문진영 서강대 교수 등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교수들과 함께 설계한 바 있다. 올해 10년을 맞은 국민기초생 활보장법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그 제도도 예산의 제약으로 점점 약화되어 가더니 이명박 정권 들어서서는 대폭 축소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 법으로도 포괄 못하는 사각지대가 45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장 내일의 희망이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 그래서 보다 현실적인 복지체제를 다시 설계해야하는 상황이다. 기본소득제도에 대한 고민은 그런 반성에서 시작됐다.
"과잉유동성 800조, 자본이 지급하지 않은 노동의 대가"
프레시안 : 고용보험 등 기존의 복지제도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수봉 :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반영한 것인지 아닌지 여부다. 우리가 벤치마 킹한 서구의 복지체제는 성장과 고용의 비례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도성장 시기에는 완전한 고용이 가능했고 나머지 잔여적 복지만 신경 쓰면 됐다. 그러나 저성장 시기에는 적극적인 복지체제가 필요해졌다. 그 결과 워크 페어(work fare)나 직업훈련, 고용보험 등의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문 제는 지금 자본주의 체제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100명이 하던 일을 지금은 10명이 한다. 이에 따라 노동과 소득이 분리돼 가고 있다. 다시 말해 노동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노동, 측정 가능한 노동에 대한 소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사회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이 많다. 가사노동 뿐 아니라 우리 정보통신 산업의 기반이 되는 개별 사용자들의 블로그 포스팅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아무 대가를 받지 않는 노동인데 그 노동의 결과로 누군가가 이익을 보고 있다. 800조가 넘는 우리나라의 과잉유동성 자금은 자본이 지급하지 않은 노동의 대가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게 다가 이런 과잉유동성 자본이 사회의 암 덩어리가 되고 있다. 암 덩어리가 생겨나는 제도를 바꾸는 복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복지체제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법은 정부 예산에 사람 수를 때려 맞춘다. 실업급여는 최장 8개월이면 끝난다. 그 이후에는? 알아서 죽어 달라는 것이다.
"일하지 않아도 월급 주면? 양극화 해소 뿐 아니라 GDP도 증가"
프레시안 : 기본소득제도가 현재의 '고용 없는 성장'의 근본 해결책이 된다는 얘기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제도 도입 시 예상되는 효과를 설명해 본다면?
이수봉 : 기본소득제는 전체 국민의 삶의 질 뿐 아니라 국가 경제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일단 아래로 피가 돌게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선순환 경제를 창출할 수 있다. 중산층 이하의 실질소득이 증가하면 소비도 늘어나고 이에 따라 생산도 증가하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불로소득에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이 돈이 일자리가 늘어나는 방향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하면 제조업의 경우 잔업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나타날 것이다. 또 다른 일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비자발적인 실업은 대폭 줄어든다. 전체적으로 GDP 감소 효과보다는 증가 효과가 클 것이다.
물 론 가장 많은 혜택을 보는 대상은 비정규직, 실업자, 노령층, 가정주부 등이다. 현재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의 실질소득이 증가하는 셈이다. 이에 따라 부가적인 효과도 있다. 가정주부가 독자적 소득과 경제권을 향유하면 집안에서의 남녀평등도 훨씬 확대될 것이다.
사실 우리 경제의 고질적 문제 가운데 하나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극심한 임금격차, 그리고 이로 인한 인력의 양극화다. 대기업에는 우수 인력이 몰려드는데 중소기업은 우수 인력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기본소득제도는 이런 임금 격차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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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소득제는 전체 국민의 삶의 질 뿐 아니라 국가 경제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일단 아래로 피가 돌게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선순환 경제를 창출할 수 있다."ⓒ사회당 | "브라질, 내년부터 전면 도입…유럽은 이미 논쟁적 담론이 됐다"
프레시안 : 이미 브라질이 이 제도를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고 2010년부터는 전면 도입할 계획이다. 외국에서의 논의와 시행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이수봉 : 브라질 룰라 정부는 현재 '볼라 파밀리아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정책을 통해 월 120브라질달러(약 5만5000원) 이하의 소득이 있는 1120만 가구, 약 4500만 명에게 월 50브라질달러(약 2만4000원)을 지급한다. 자녀 1인당 15브라질달러(약 7200원)를 추가로 지급하고 있다. 이 제도는 2010년부터 고소득자 등 전체 국민과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월 40브라질달러(약 1만9000원)를 지급하는 '시민 기본소득 제도'로 바뀔 예정이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4인 가족은 월 160브라질달러(약 7만6000원)를 받게 된다.
나미비아의 오미타라 지역도 지난 2006년부터 시범적으로 이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이다. 60세 미만에게 월 100나미비아달러(약 1만9100원)를 지급하는 것이다. 효과는 당장 드러나고 있다. 본래 이 지역에서 식량 구걸이 심각한 사회 문제였는데 거의 사라졌다. 당연히 범죄율도 줄어들었다. 나미비아 역시 오미타라 지역에서 시범 실시한 이 제도를 조만간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유럽에서는 아직 이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까지도 기본소득제도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담론이 확산돼 있다. 웬만한 진보정당의 강령에 다 기본소득제 도입이 들어가 있다. 사실 유럽은 기존의 복지제도가 워낙 잘 마련돼 있어 이 제도들을 통합만 해도 월 120만 원 정도 지급할 재원이 마련돼 있다. 유럽은 기본소득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기본소득인지가 문제다.
"세금 올려 손해 보는 사람은 10%…90%는 이득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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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국민 가운데 손해를 보는 비율은 고작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더 내는 세금보다 국가로부터 받는 돈이 더 많다."ⓒ프레시안 | 프레시안 : 그런 저런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재원 마련이 쉽지 않아 보인다. 재원은 현실적 가능성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수봉 : 우리가 설계한 모델에서 기본소득의 재원은 일부는 기존의 복지제도 재원을 끌어오고 일부는 조세를 통해 조달하는 것이다. 당연히 조세 제도를 바꿔야 한다. 기본소득의 핵심 담론 중 하나가 세재개편이다. 세재 개혁의 원칙은 모든 소득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증권양도소득세와 토지세를 신설한다. 또 이자, 배당 등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30%를 일률적으로 원천징수한다.
이 모델에 따라 계산을 돌려보니 전 국민 가운데 손해를 보는 비율은 고작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더 내는 세금보다 국가로부터 받는 돈이 더 많다. 한 마디로 90%에게는 모두 이익이라는 얘기다. 또 그 10%의 사람들에게도 사실 사회변화로 얻는 이익을 생각하면 결코 손해는 아닐 수 있다.
프레시안 :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하더라도 부작용은 늘 있다. 당장 나올 수 있는 질문은 다들 일 안하고 돈을 벌려고 하면 어떻게 하냐는 지적일 것이다.
이수봉 : 일시적으로는 자발적 실업이 다소 증가할 수 있다. 원하는 일을 하려는 사람이 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일시적일 것이다. 기본소득을 받더라도 일자리가 있으면 수입이 더 늘어나기 때문에 취직 요인은 충분하다. 다만 소위 3D 직업의 임금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도 사회적으로 긍정적 효과로 작용할 것이다.
아마 현실적으로는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렇게 많은 지원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근로의욕을 감소시키지 않도록 섬세하게 설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국의 노숙자와 외국 노숙자의 차이는 마약이 없고 근로 의욕이 살아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금만 기본적인 조건이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재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하루에 35명씩 자살하고 있고, 사회에 나오는 많은 청소년들이 비정규직 외에 다른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현실이다. 이것은 사실상 지옥이다.
놀고먹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한마디로 잘난 체하는 한가한 주장이다.
프레시안 : 조세 저항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혜택이 좋다 하더라도 일단 세금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이수봉 : 기본소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핵심 주장이 그런 것이다. 일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생겨나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생각이 보편적이지 않다. 그런 우리가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의 저항을 언젠가는 반드시 한 번은 극복해야 한다.
또 1%씩 단계적으로 올리든지, 한번에 25%를 올리든지 저항은 마찬가지다. 단계적인 세율 인상은 바꿔 말하면 장기적인 저항을 불러온다. 1%씩 25년 간 올리려면 25년 동안 같은 저항과 싸워야 한다. 중간에 정권이라도 바뀌면 물거품이 된다.
사 실 사람들이 세금을 내기 싫어하는 것은 많이 내는데 나한테 돌아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종합부동산세가 급식소의 급식비로 사용된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을 다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바로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내가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는지를 계산하게 될 것이다. 무조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패러다임의 전환…일하는 않는 자는 굶어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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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100명 가운데 반드시 50명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49명은 직장을 갖고 있고 1명은 사업자다. 그런 백화점 질서 아래서 '노동 중심' 패러다임대로 라면 49명과 50명이 끝없이 49개의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 : 기존의 복지제도와는 그 토대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발상인 듯 보인다.
이수봉 :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얘기다. 기존의 복지는 노동 중심 패러다임이다. 노동가요에도 있는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슬로건도 똑같다. 일종의 '노동 신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와 비슷한 맥락의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슬로건이 독일 나치의 수용소에 걸려 있던 구호였다. 자본주의는 이런 강박관념을 이용한다.
지금은 100명 가운데 반드시 50명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49명은 직장을 갖고 있고 1명은 사업자다. 그런 질서 아래서 '노동 중심' 패러다임대로 라면 49명과 50명이 끝없이 49개의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그 결과가 비정규직 아닌가? 그렇게 접근하지 말자는 것이다. 하루 4시간 씩 100명이 나눠 일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가 달성한 성과의 기초 위에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을 전제로 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문제는 과잉 형성된 자본이며 금융자 본으로 나타난다. 이 과잉자본은 일종의 암 덩어리이며 필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인간과 지구를 파괴하게 된다. 이 암을 만들어내는 체제를 해체하는 것은 사회를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작업이다. 기존의 복지제도는 이 암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그대로 두고 대증요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계가 있었다. 기본소득개념은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프레시안 : 제도의 철학적 기반도 중요하지만, 현실 정치 문제를 배제할 순 없다. 제도 도입을 둘러싼 논란은 정치의 영역 아닌가.
이수봉 : 그래서 누가 이런 얘기를 하는가가 중요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대선에 나와 "부자의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겠다"고 했을 때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얘기를 누가 하는가이다. 독일의 경우 거대 자본가이자 경영학 교수인 베르너가 텔레비전에 나와 기본소득 얘기를 해 화제가 됐다. 급격하게 담론도 만들어졌다.
사실 우리가 지난 10년 정부에서 서구 유럽의 복지 모델을 많이 들여다봤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아름다운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이식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구의 아름다운 복지 체계는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와 볼세비키라는 현실적 위협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가들의 일종의 타협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혁명가들의 피눈물을 모두 생략해버리고 가져와 심으려고 하니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지난 10년 정부 동안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방향을 모았더라면 지금처럼 진보세력이 추락했을까 싶다. 정부 안으로 들어가기보다 정부 밖에서 위협적 존재로 작용했더라면 복지도 더 잘 됐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보 학자, 노동운동가들이 지난 두 정부를 거치면서 정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보이는 변화는 크지 않았다. 관료들의 벽이 막강했던 탓이 크지만, 대중들은 직감적으로 '좌파는 무능하다'고 판단해 버렸다.
민주노총이 무력해진 이유도 현실 가능한 요구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최근 쌍용자동차 사태를 보면서 분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오랫동안 작은 개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근본적 변화가 없이 부분적 개혁에만 천착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현실가능성을 재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프레시안 : 기본소득이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그 목표를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수봉 : 기본소득은 정책이 아니라 일종의 담론이며 깃발이다. 차려진 뷔페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건드리지 않은 채 내놓는 복지 정책들은 그렇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경제위기의 현실적 대책, 시스템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 요구이다.
기본소득은 그 자체,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시간 단축과 총체적인 세제개혁과 하나의 쌍을 이룬다. 그래서 한국사회 전체의 모습을 바꾸는 요구다. 이것은 사회주의냐 사민주의냐와 같은 이념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 체제의 변화를 반영한 실질적인 요구다. 이념형이 아닌 생존형의 이 요구는 그래서 프레임을 바꾸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대 개 사람들은 그런 전망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이미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되묻고 싶다. 현실적인 꿈은 무엇인가? 고급아파트, 차, 명품들? 그런 것들이야말로 자본이 요구하는 꿈이다. 인간의 진정한 꿈은 더불어 행복하고 평화롭게 잘사는 것. 그것에 물질적 조건도 기여하는 그런 세상이 아닌가? 그런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는 질문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답을 한들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행계획을 논하기 전에 그런 목표를 우리가 공유하는가를 먼저 확인하고 싶다. 우리가 꾸는 꿈이 과연 같은 꿈인가? 만일 같은 꿈을 꾼다면 답은 간단하다. 여럿이 함께 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럿이 감으로써 길은 만들어진 것이다.
프레시안 : 긴 시간 얘기 감사하다.
/여정민 기자,전홍기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