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지금 노동과 복지 영역에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저임금 비정규직이 오히려 정규 고용 형태처럼 보편화되고 있고, ‘고용 없는 성장’ 속 일자리 대란에 빈곤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정보기술 혁명이 주도하는 경제에서 승자독식이 판치면서 분배 상태도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기존의 20세기 경제성장 모델에 기초한 전통적 복지 시스템은 한계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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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소득은 국세청 컴퓨터에 모든 국민의 예금통장 번호를 입력해놓고 매달 걷힌 세금을 그대로 입금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2009년 5월 노동절 대회에서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기본소득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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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7∼29일 서울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는 이처럼 기로에 선 대한민국의 노동·복지 체계를 대전환하자는 원대한 구상을 던진 자리였다. ‘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과감한 ‘정치·경제적 기획’이 던져진 것이다. 이번 대회에는 현대적 기본소득 이론의 창시자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basicincome.org) 의장을 맡고 있는 판 파레이스 벨기에 루뱅대 교수와, 2004년 세계 최초로 브라질에서 시민기본소득법 제정에 앞장선 수플리시 상원의원 등이 참가했다.
<한겨레21>은 기본소득 구상의 내용과 실현 가능성을 다각도로 조망해본다. 기본소득 제안은 과연 정치적 상상력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복지·노동 패러다임의 전면적 변혁으로 이어질 것인가?
‘기본소득’이란?
‘기본소득’(Basic Income)은 정부가 어떠한 수급 자격이나 요구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정기적으로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전체 사회 구성원에게 지급되며, 최저생계비 이상 수준으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지급액이 증가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등 전통적 복지제도와 견줘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인 선택적 복지제도는 복지 수혜가 필요한 대상자를 자격조건 심사 등을 통해 가려낸 뒤 이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차등 금액을 지원한다. 최저생계비 수준을 정해놓고 이에 미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최저생계비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금액만큼을 지급하는 식이다. 우리나라와 미국 등지에서 실시되는 또 다른 선택적 복지제도로는 근로소득장려세제(EITC)가 있다. 이른바 ‘마이너스 소득세’로 불리는데, 근로를 하는 이들 가운데 일정 소득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소득을 보전해주는 제도다. 수급 자격으로 △부부 총소득 연간 1700만원 이하 △가구 재산 1억원 이하 △주택 기준시가 5천만원 이하 등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나 근로소득장려세제 모두 근로소득과 자산 등에 대한 조사가 뒤따르기 때문에 막대한 행정비용이 수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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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단순한 복지체계의 변화를 넘어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대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지난 1월27일 서울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의장인 판 파레이스 벨기에 루뱅대 교수(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이 기본소득 서울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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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아무런 조건도 없고, 소득금액도 묻지 않고, 대한민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도 동일한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 기존의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인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회에서는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근로소득장려세제 같은 제도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즉, 기존의 모든 선별적 복지제도가 기본소득제도로 통폐합된다. 또 가입자 납부를 통해 운영되는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은 온전히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식으로 전환되거나 점차 소멸되는 것이 마땅하다. 반면, 교육·의료·주거·보육 등 ‘기본복지’는 기본소득과 함께 더 확대돼야 한다.
재벌에서 거지까지 해당되는 ‘보편적 복지’
기본소득 논의의 시작은 1980년대 중반 벨기에에서 구성된 ‘샤를 푸리에 서클’이다. 이들은 “개인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매달 지급하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 1988년에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확장됐다. 브라질의 경우 2001년 브라질 상원의원 수플리시가 제안해 2002년에는 시민기본소득 법안이 상원에서 승인받고, 2004년 1월 룰라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했다. 독일에서는 2009년에 5만2천 명 이상의 독일 시민이 온라인 청원을 통해 조건 없는 기본소득 도입을 요구했고, 총선에서 100명 이상의 후보가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한국에서는 2007년 한국사회당(현 사회당)이 기본소득 도입을 내걸었고, 2008년에 사회당·민주노총·관련 연구자 등이 참여하는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결성됐다.
1인당 얼마나 기본소득으로 받을 수 있나?
기본소득은 매우 간단명료한 아이디어다. 기본소득은 ‘생계를 보장할 정도로 충분한 수준’이라는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기본소득 모델은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의 원칙을 따르되, 수많은 형태의 모델이 존재할 수 있다. 기본소득 지급 수준은 월 10만원이 될 수도 있고 100만원이 될 수도 있다. 재원인 기본소득기금을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물론 기본소득제를 실시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존 전통적 복지제도에 들어가는 비용을 기본소득으로 모두 전환하더라도 가히 혁명적인 조세제도 개혁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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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1. 연간 소득별 기본소득세 부담액과 기본소득 수령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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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제시된 모델 가운데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제시한 기본소득제 도입안(표1 참조)을 살펴보자. 세금을 통해 연간 약 290조원의 재원 조달이 요구되는데, 이 정도의 재원이 마련되면 1인당 연 600만∼800만원을 지급할 수 있다. 이 표를 통해 개인이 내야 할 세금과 얻게 될 기본소득을 비교해 보면, 연 과세 대상 소득이 1억원에 달하는 사람조차 가족이 2인 이상일 경우 기본소득으로 인해 실질소득이 늘어나게 된다. 즉, 대다수 중산층을 포함해 임금노동자의 90% 정도가 세금을 내고도 이익을 보게 된다.
지급액은 일단 확보되는 재원 수준에 맞춰
물론 나이에 따라 지급 수준에 차등을 두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기본소득을 연령에 따라 차등화하되 성인이 된 이후에 최고 수준의 급여를 지급하도록 제안하기도 한다. 기본소득이 본래 ‘정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지향하고 있지만, 적당하고 즉각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며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정밀한 제안이 중요한 건 분명하다.
기본소득을 위한 투쟁은 ‘모 아니면 도’식의 게임이 아니다. 여러 유형의 제안이 유력하게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무조건적인 상당한 수준의 급여’라는 주장을 다소 양보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진보신당 장석준 연구기획실장(상상연구소)은 “문제는 기본소득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어떤 과도 전략들을 통해 실현시킬 것인가”라며 “전 국민에게 비교적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서 출발할지, 아니면 상당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서 출발할지가 쟁점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기본소득, 노인 기본소득 등 특정 인구집단에서부터 실질적 수준의 기본소득을 도입한 뒤 점차 보편화하는 전략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계층을 중심으로 복지동맹을 구축해 초기 지지 기반을 형성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누가 혜택을 보고, 누가 손해를 입게 되는가?
한신대 강남훈 교수(기본소득네트워크 한국대표)가 간단한 표로 기본소득으로 인한 소득 변화를 제시한 바 있다(표2 참조).
이 모델은 상당한 비중의 기본소득 재원을 불로소득에서 거둬들이고, 세금은 각자의 소득액에 비례해 징수된다고 가정한다. 한국 경제가 총 28명(정규직 10명, 비정규직 10명, 실업자·노인 5명, 불로소득자 3명)으로 구성돼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에 자영업자는 빠져 있다. 복지가 전혀 제공되지 않는 상태에서 불로소득자는 1인당 월 2천만원, 정규직은 400만원, 비정규직은 200만원을 벌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한국 경제 전체 국민소득은 1억2천만원이 된다. 이때 저임금 빈곤층 내부에서의 소득 격차(비정규직과 실업자의 소득 격차)는 200만원이다.
무노동자보다 비정규직에게 더 이익
전통적인 복지체계에서 세금을 거둬 실업자에게 100만원을 준다고 하자. 그러면 불로소득자의 소득은 1916만원이 되고, 복지세금 공제 뒤 정규직 임금은 383만원, 비정규직 임금은 191만원이 된다. 비정규직과 실업자의 소득 차이는 91만원으로 줄어든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어떻게 될까? 실업자든 불로소득자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누구나 100만원씩 받게 되면, 불로소득자의 소득은 1633만원, 정규직은 406만원, 비정규직은 253만원의 소득이 생기게 된다. 비정규직과 실업자의 소득 차이는 153만원으로 더 커진다.
요약하면, 똑같은 총국민소득 1억2천만원을 나눠 가질 때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정규직 소득도 늘어나고 비정규직 소득은 더 크게 늘어나게 된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실업자가 기본소득 도입에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불로소득 생활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계층에서 소득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기본소득을 도입했을 때 전통적 복지에서보다 비정규직과 실업자 간 소득 격차가 더 커진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근로 유인이 더 커진다는 얘기다. 게다가 전통적 복지에서는 복지 수혜 자격 심사에 막대한 행정비용이 수반되지만, 기본소득 체제에서는 이런 행정비용이 한 푼도 들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재원이 복지 수혜자의 지갑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기본소득은 국세청 컴퓨터에 모든 국민의 예금통장 번호를 입력해놓고 매달 걷힌 세금을 그대로 입금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기본소득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기본소득 기금은 특별세 부과 등을 통해 목적세 방식으로 조성할 수도 있고, 일반예산으로 또는 토지세나 천연자원세로 조성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매우 넓은 범위로 확장된 부가가치세를 통해 조성하자는 제안도 있다.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가 기금 조성의 유일한 원천일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로소득세와 토지세, 환경세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주식양도소득에 과세가 되지 않고,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표3’은 소득세와 부가가치세는 제외하고 토지세·환경세·불로소득세 신설을 통해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할 경우 연간 253조원의 기본소득 재원이 조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불로소득에는 30%, 토지에는 지가의 3%를 과세한다. 토지세를 부과해 불로소득을 환수하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해 경제 안정화에 기여하고, 지가를 낮춰 생산활동도 장려하게 된다. 환경세 쪽을 보면, 환경세 부과로 전반적인 물가 상승이 일어나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세는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어차피 부과해야 할 세금이다. 강남훈 교수는 “농산물에는 환경세가 대부분 부과되지 않을 것이고, 환경세 부과로 인해 훨씬 더 큰 금액이 기본소득으로 지급될 수 있다”며 “환경세와 기본소득을 결합하면 환경세로 인한 조세 증가분을 낭비 없이 민간에 되돌려주는 방법이 된다”고 말했다.
혁명적인 수준의 조세 개혁 수반돼야
물론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보다 기본소득 재정에 더 많이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기본소득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기본소득까지 지급하게 된다. 어쨌든 기본소득이 도입되려면 혁명적인 조세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세금과 각종 부담금 등 국민 부담률을 현재의 25% 수준에서 50% 수준으로 증가시켜야 고복지국가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런데 소득이 높아질수록 납세자 수는 더 적어진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세율을 높여야 하는가?
그 해답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율 인상이 예상되는 소득 구간에 속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 최하층의 세율을 상당 정도 인하하려면, 그다지 소득이 높지 않은 광범위한 소득 계층에서 세율을 상당한 정도로 인상해야 한다. 하지만 임금수준이 다소 높은 노동자는 세율은 인상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주요 수혜자가 될 것이다. 임금에 대한 세금 인상액이 그들이 받게 될 기본소득액보다는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사회의 가장 생산적인 노동력이 대부분 집중된 소득 구간(중간소득층)에서는 근로 동기가 감소하지 않도록 적절한 세율을 책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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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소득을 둘러싼 더 많은 논쟁이 불붙어야 한다. 1986년 벨기에 루뱅라뇌브대학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창립 모임. 한겨레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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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훈 교수는 “세금을 1∼2%만 올려도 부자들이 ‘세금폭탄’ 운운하며 강력하게 저항하는데, 세율을 1%포인트씩 올리면 기본소득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 25년이 걸린다. 1% 올리나 25% 올리나 저항하기는 마찬가지니까 점진적으로 부담률을 높이기보다는 한 번에 25% 올리는 것이 더 맞는 전략일 수 있다”며 “점진적 증가는 저항의 장기화를 초래하게 된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도입했을 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강남훈 교수에 따르면, 기본소득 도입을 통한 분배 상태의 개선만으로도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 게다가 경제가 성장하면 기본소득 관련 조세도 더 많이 걷히게 된다. 기본소득이 국내총생산(GDP)의 3.5%를 증가시킬 경우(상자 기사 참조) 세율을 50%라고 하면 조세 수입도 1.75% 정도 증가하게 된다. 특히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생필품을 중심으로 하는 내수시장이 활성화된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내수 중심 경제를 건설하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생필품 수요를 증가시킴에 따라 자영업자들의 소득도 크게 늘어나게 될 것이다.
내수시장 활성화로 자영업자 소득도 증가
기본소득은 단순한 복지 체계의 변화가 아니다. 일, 여가시간, 소득, 노동, 빈곤, 실업, 근로소득자와 자영업자 등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대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이 메커니즘을 자세히 따져보자. 최저생계비 제도 아래에서는 노동 유인을 갖지 못해 ‘실업 함정’에 빠지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기본소득 제도에서는 실업 함정이 아예 사라진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저임금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공급을 줄이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일정한 소득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굳이 장기간 근무를 할 필요가 없어 노동시간은 단축되고, 결국 일자리 나누기에 기여하게 된다. 기본소득은 소기업이나 벤처기업 창업에 큰 도움을 주고, 농업에도 소득보조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협동조합, 비영리기업, 사회적 기업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지원 효과가 분명히 커질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 읽고 연구하는 사회가 가능해질 수 있다. 특히 전통적 복지는 노동을 조건으로 수혜를 제공하므로 나쁘고 형편없는 저임금 일자리라도 일해야 한다. 반면 기본소득제 아래에서는 발전 가능성이 없고 형편없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시민권’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통적 복지 체계에서 발생하는, 급여를 수급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낙인 효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소득 아래서는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기본소득의 전액을 가질 수 있으므로 노동하지 않을 때보다 노동할 때 더욱 부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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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대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회의에서 브라질 수플리시 상원의원(오른쪽 사진 맨오른쪽)이 발표 하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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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과연 실현 가능한가?
물론 맹렬한 저항이 예상된다.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기본소득이 실업·빈곤을 포함한 수많은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반면 혹자는 경제학적으로 결함이 있고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제안이라서 조만간 잊혀질 것이라고 일축한다. 한국 국가의 성격 등을 고려할 때 이런 혁명적 대안을 누가 선뜻 수용하고 또 관철할 수 있겠느냐는 비관론도 있다.
이에 대해 판 파레이스 교수는 “이런 저항은 점차 극복될 수 있다. 기본소득 논의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오히려 강력한 논쟁을 거쳐 결국 현실이 될 수밖에 없는 21세기의 몇 안 되는 분명한 아이디어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
기본소득의 지급 수준을 구체화하고, 현존하는 사회보장급여들을 어떻게 대체할지를 명확히 한 이후에 기본소득의 실현 가능성을 물을 때에만 합당한 대답이 가능하다. 예컨대 “지금의 모든 사회보장급여를 폐지하고 그 예산을 모든 이에게 낮은 수준의 정액 급여로 분배한다면 실현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그렇다”이다. “지금의 모든 급여를 그대로 유지하고 한 사람이 안락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준의 급여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면 실현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아니다”이다. 사실 진지한 제안들은 이 양극단 사이에 위치한다. 즉, 어떤 기본소득 제안이 실현 가능한지 여부는 개별 제안들을 살펴본 뒤 판단해야 한다.
강남훈 교수는 “한국은 불로소득 형태로 부가 집중돼 있고, 다수가 찬성하면 기본소득을 충분히 정치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만물은 계기가 되면 크게 변할 수 있다. 촛불이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촛불을 예측하지 못했다”며 “우리 국민이 매우 경쟁적이고 금전적 이득을 잘 따지기 때문에 오히려 기본소득처럼 ‘같이 내고 같이 받는’ 것이 분명한 복지제도를 더 선호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 이수봉 대변인은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매우 급진적인 구호가 대중적으로 유행하고 있지 않은가”라며 “기본소득 개념을 아직 대중에게 공표하고 조직하지 못하고 있을 뿐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어떤가? 당신은 기본소득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더 많은 논의와 더 많은 찬반 논쟁이 불붙어야 한다. 이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내가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게 될지 각자 찬찬히 계산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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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훈 기본소득네트워크 한국 대표
“기본소득 구상 의외로 빨리 전파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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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훈 한신대 교수.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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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훈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기본소득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다. 강 교수는 “기본소득 구상을 설명하면 사람들이 ‘아, 그렇게만 되면 참 좋겠네’라면서도 ‘그런데 과연 그게 될까, 부자들이 그만큼 세금을 더 낼까’ 등의 의문을 단다”며 “하지만 기본소득은 순식간에 파괴력 있게 전파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복지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에 이를 정도로 거의 ‘무복지’에 가깝다. 비정규직과 자영업자 비율도 전세계적으로 매우 높고, 대규모 빈곤노인 계층이 있다. 자영업자 600만 명 중 400만 명 정도는 비정규직보다 영세한 상태다. 청년실업자도 많고 어느 계층 할 것 없이 기본소득이 절실하다. 희망을 빼앗긴 사람들이 대규모로 존재하지만, 당장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기본소득이 이미 20여 년 전부터 소개되고 있다. 대안을 절실하게 갈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 구상은 의외로 빨리 파괴력 있게 전파될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충분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일단 절반이라도 혹은 4분의 1 정도만이라도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형태로 가면서 꿈을 점점 키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막대한 기본소득 재원 마련에 대해선 “근로소득세와 법인세·부가가치세는 현행 세율을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약 250조원의 기본소득 기금을 충분히 만들수 있다”고 강조했다. “불로소득(이자·배당·증권양도소득 등)에 대해 30% 세율로 과세하고, 환경세를 국내총생산(GDP)의 4% 수준(약 40조원)으로 부과하고, 재산세·종부세 등은 모두 토제세로 통합하되 지가총액에 대해 3% 세율로 과세하면 여기서 또 약 60조원의 세금이 걷힌다.” 그러면 약 250조원의 기본소득 재원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우리 국민은 경제성장을 부르짖는 정치 세력에게 표를 던져왔고, 그래서 경제성장의 과실을 얻어 자신의 경제적 지위가 개선되기 바라는 성향이 강하다“며 “지난 수십 년간 이런 기대를 해왔으나 그런 믿음이 잘못됐다는 것이 점점 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일수록 소비 성향이 훨씬 높다. 2008년에 조세를 추가로 170조원 걷어 기본소득으로 나눠준다면, 이런 소비 성향 효과에 따라 GDP가 추가로 31조9천억원(3.5%) 증가하게 된다. 즉 기본소득 도입을 통한 분배 개선만으로도 매년 경제가 3.5% 더 성장하게 된다. 물론 경제가 성장하면 기본소득 조세도 더 많이 걷힐 것이다.”
그는 또 기본소득 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보편적인 기본소득 모델로 보면 적어도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자신의 시장임금소득보다 약간이라도 더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세청이 소득 데이터를 제공한다면 소득수준별 인원 수를 뽑아내 인구의 몇%가 기본소득으로 이득을 보게 되는지 금방 추산할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경제가 망한다느니 하는 반대론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다. 지금은 이런 비판도 없는 상황이다. 진보정치 영역을 포함한 현실 정치 세력에서 토론과 비판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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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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